정보계시판

[스크랩] [종가기행 65] 晉州 鄭氏 愚伏 鄭經世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

회기로 2010. 1. 24. 19:51

[종가기행 65] 晉州 鄭氏 愚伏 鄭經世 (진주 정씨 우복 정경세)
15대 종손 정춘목(鄭椿穆) 씨
24대를 내려온 선비의 가문… 한 집에 두 분의 불천위 모셔
10살 때 교통사고로 아버지와 사별… 낙향 후 종택 지키며 조상 받들어

선대의 묘소

진주 정씨는 진주 강(姜)씨, 진주 하(河)씨와 함께 ‘진양삼성(晉陽三姓)’으로 인정받는 저명한 씨족이다. 진주 정씨가 고향을 떠나 경북 상주로 터를 잡은 이는 우복 정경세의 8대조인 정의생(鄭義生, 判事府使)까지 소급된다.

종손 정춘목(鄭椿穆, 1966년생) 씨는 우복 정경세 선생의 종손일 뿐 아니라 상주 입향조 정의생의 부친인 정택(鄭澤, 監察御史)으로부터도 주손이다. 경북 상주에 있는 우복 종택은 24대를 면면히 내려온 집이다.

종손으로부터 들은 바로는, 24대를 내려오면서 종손의 조부(鄭龍鎭, 1910년생) 대에 단 한번 양자가 있었을 뿐이라 한다. 이는 타문(他門)의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례다. 우복 종가는 우복을 시작으로 15대를 이어오면서 종가에서 네 분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이 역시 매우 드문 예다. 또한 한 집에 두 분의 불천위를 모시고 있다. 우복이 국불천위(國不遷位), 그의 6대손 입재 정종로(대산 이상정의 수제자)가 사림불천위(士林不遷位)다. 한 가문에 한 분의 불천위를 모시기도 어렵다. 필자 역시 선대에 불천위가 없다.

우산의 우복 종가는 어떤 집인가? 이를 위해 먼저 우복이란 분의 위상을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우복은 경북 상주는 물론 영남을 대표한 인물이었다. 홍재전서에서 정조가, 영남 출신 관료를 만나 영남의 인물 개황을 요약한 대목이 있다.

정조는 인물이 많이 나기로 조선 최고인 영남 출신 선현으로, 함양의 일두 정여창, 금산(金山, 현재의 경북 김천시 지역)의 매계 조위, 안동의 충재 권벌, 경주의 회재 이언적, 예안의 퇴계 이황, 진주의 남명 조식, 성주의 한강 정구, 상주의 우복 정경세, 인동(仁同, 현재의 경북 구미시 지역)의 여헌 장현광 등 9사람만을 손꼽았다.

종손 정춘목 씨

이들이 끼친 교화로 인해 그 지역이 당시까지 200여 년 간 향리에 글 읽는 소리가 곳곳마다 들렸고, 훌륭한 선비가 줄을 이었을 뿐 아니라 집집마다 정자(程子)와 주자(朱子)를 섬기고 시서(詩書)를 읽어 풍속이 순후(淳厚)하고 촌락들이 편안하였다고 판단했다.

국왕이 한 지역의 사정에 대해 이처럼 정통할 수 있을까? 놀라울 뿐이다. 이러한 인식 아래 정조는 회재 이언적과 퇴계 이황 두 선정신(先正臣)의 교화(敎化)의 공(功)을 기린 뒤 안동 도산서원에서 특별 과거시험을 실시하기도 했다. ‘도산별과(陶山別科)’다.

영남에서의 우복은 학식과 문장 그리고 풍부한 정치적 경륜 등으로 그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반대파들은 그가 당파를 일삼았다고 파상 공세를 폈지만, 그에게는 숙명적으로 영남 남인의 구심체적 역할이 부여되었다.

우복은 서애 류성룡의 수제자다. 서애 사후 영남의 선비들은 학문이나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마다 우복의 견해를 물어 따랐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당시 안동에 건립한 여강서원(廬江書院, 퇴계와 학봉 서애 세분을 모신 서원) 묘우에 퇴계의 수제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 두 분을 모심에 있어서 그 위차(位次, 昭穆, 順次)에 대한 이견(異見) 조정이다.

우복의 견해를 참조해 학봉을 서쪽에 서애를 동쪽으로 모시는 것으로 끝났다.

조선 후기에 병호시비(屛虎是非)로 학봉과 서애 두 분의 학통을 계승한 양대 학단이 서로 엇갈릴 때 오랫동안 봉합되지 못한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영남 지방에 이를 원만히 조정할 큰 인물이 없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여기에 더해 우복의 학자로서의 면모를 들고 싶다. 우복은 퇴계와 서애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학통을 계승한 분이다. 그런데 그간 우복이 학자로서 주목되지 못한 바는 그의 선사인 서애 류성룡의 경우와 흡사하다.

서애를 학자로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그가 영의정이라는 관료로서의 탁월한 업적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복 역시 24살에 문과에 급제한 이래 여러 주요 관직을 역임한 뒤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과 이조판서에 이른 관료로서의 이력이 그의 학문적 업적을 얼마간 가린 것이다.

그는 퇴계 학단에서 심혈을 기우려 편찬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20권 10책, 1558년 초간 이후 수차 간행)를 간행했으며 여기에 더해 그 내용을 더욱 응축한 형태로 만든 주문작해(朱文酌海, 16권 8책, 사후인 1648년에 간행)를 편집하기도 했다. 우복은 선조와 광해군, 인조 대를 대표하는 학자요 국왕의 선생님으로서 그 명성을 떨쳤다.

효종 즉위년에 동춘당 송준길은 신독재 김집을 추천하면서, 선조 때의 정경세의 예처럼 질병과 사고가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주 경연에 입시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효종은 즉시 그 건의에 따랐다. 동춘당은 우복의 사위요 제자이면서 문묘(文廟)에 배향된 조선을 대표하는 학자다.

우복 종가는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우산천(愚山川)을 끼고 난 뚝 길을 따라 가다 다시 작은 다리를 건너 종가 지역으로 접어들었다. 우복 선생이 직접 지어 별업(別業)으로 사용했던 자그마한 초당(草堂, 溪亭)과 6대손 입재 정종로(1738-1816)가 크게 중창한 종택 부속 정자인 대산루(對山樓)가 정겹게 눈에 들어왔다.

그 앞으로 명미한 산들에 읍을 하듯 늘어 서 있다. 시냇가 한 쪽에 자리 잡은 큼직한 바위는 선생이 이름 지은 ‘바보바위(愚巖)’다.

우암 곁 석벽에 쓴 ‘문장공(文莊公) 우복(愚伏) 정 선생(鄭先生) 별업(別業, 학문과 수양을 위해 별도로 마련한 공간)’이라는 암각서를 보면서 이곳이 조선 중기 명신 우복 정경세 선생의 은거지 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벼슬에서 물러나 죽장망혜(竹杖芒鞋)로 오갔을 산과 물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초당과 대산루를 지나서 왼편으로 비스듬히 난 가파른 길을 잠깐 오르면 종택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솟을 대문을 지나 마주한 사랑채에는 ‘산수헌(山水軒)’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곳에 올라 우산팔경(愚山八景)을 바라보면 그곳이 명당임을 단번에 알 수 있다.

사랑채에서 바라본 우산 전경

출타한 종손의 모친인 노종부 이준규(李準奎, 예안 이씨, 1943년생) 여사를 만났다. 노종부는 안동시 풍산 우렁골 예안 이씨로 태어나 17살 때까지 진외가인 영주 선성 김씨 두월 마을에서 살았다 한다.

오늘날의 우복 종가를 굳건하게 지탱해준 장본인이다. 노종부는 우복 종가로 시집온 뒤 2남 2녀를 낳았다. 단란한 살림은 남편(鄭演, 1938-1975)이 돌연 운명하면서 말할 수 없는 시련이 닥쳤다. 당시 춘목 씨가 겨우 10살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나갔던 사람이 교통사고로 그렇게 되고 보니 정신이 아득했습니다. 사랑채에는 시어른이 계시지요, 맏이가 10살, 그 아래로 9살, 7살, 4살이었어요. 4남매를 어떻게 키워야 하나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래서 농사일은 안 해본 것이 없지요. 논농사 밭농사, 버섯 재배......, 결국 4남매 모두 4년제 대학을 시켰고 성가시켜 아들딸 놓고 살게 했습니다. 저는 평생 ‘이 집을 어떻게 붙드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렵게 꺼낸 지난 시련을 의외로 담담하게 회고했다.

저녁상을 보겠다는 말씀을 뿌리치고 상주 시내로 돌아오는 길은 이미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산 속에 외딴 집에서 평생 종가를 어떻게 지킬까를 생각하셨을 노종부의 외로움과 여중군자(女中君子)로서의 모습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강남의 번화한 찻집에서 일을 보러 상경한 종손과 만났다. 정춘목 씨는 언제 보아도 통이 크고 선한 인상이다.

오랜 친구와도 같다. 종손은 우산에서 태어났고, 마을에 있었던 우서초등학교에 5학년 때까지 다니다 대구로 유학해 대구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협성중학교와 경북고등학교를 거쳐 영남대 농학과(1985학번)를 마쳤다.

“군을 필한 뒤 직장생활을 해보니 월급으로는 할배 제사 받들기도 어렵데요. 그래서 그만두고 바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간의 이력에 대해 물었더니 그렇게 요약했다. 생각해보니 맞는 말이다.

종가를 지키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이 여실히 그려졌다. 종손은 ‘승중손(承重孫)’이다. 승중손이란, 아버지를 할아버지보다 먼저 여의어,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장손을 말한다. 고1 때의 일이다.

“참 이상한 것은, 우리 할배가 제한테 한문을 안 가르치셨어요. 지금도 저는 그 이유를 몰라요.

사랑방에 데리고 자면서 참 귀여워해주셨어요. 우리 할배는 퇴계 종손과 친구셨어요. 두 어른이 사돈까지 맺었는데, 서울로 올라가셔서 삼일빌딩의 삼일다방에서 나란히 앉아 계시면 참 보기 좋으셨다고 해요.

사랑채에 게판된 산수헌 현판

당시는 두 분을 모시고 점심을 먹으면 그 자체가 자랑이었던 시절이었어요. 두 어른이 선현의 종손에다 풍채도 좋으시고 학문까지 겸비하셨으니 말입니다.

전형적인 영남의 종손이셨어요. 지금 퇴계 종가에 있는 퇴계 선생 문집은 우리 집에서 간 것입니다. 당시 퇴계 종가에 책이 없다고 하자 우리 할배가 바로 드렸다고 하데요.”

‘전형적’이라는 말에, 그렇다면 지금은 누가 종손의 표준이라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우리 고모부라고 생각합니다. 인품이 훌륭하시고요, 봉제사 접빈객에 조금도 흠이 없어요. 재혼을 권해도 극구 거절의 뜻을 밝히셨던 모습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종손의 고모부는 퇴계 종가의 차종손 이근필(李根必) 씨다.

종가에서 보았던 서울 한강변 절두산 잠두봉이 그려진 우복 선생 계회도에 대해 물었다.

“명주 바닥에 그린 그림인데, 많이 낡아서 제가 안방에 걸어두었습니다. 그 외의 유물 유품들은 종가 수리를 할 때 문중 어른들이 보는 가운데 모두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다 기탁해 두었습니다.

저희 집에 목판이 그렇게 많은 줄 대부분 몰랐을 것입니다. 제가 1,998매를 안동에 있는 한국국학진흥원에 보냈습니다. 말을 들어보니, 도산서원에 있는 목판 이외에는 저희 집의 것이 가장 많다고 하더군요.”

종손에게 외가와 진외가, 외외가가 어디인지 물었다. “외가는 예안 이씨 우렁골(芋洞), 진외가는 인동 남산(南山, 여헌 장현광 선생 후예)이고요, 외외가는 안동 전주 류씨 박실(瓢谷)입니다.

그리고 고모는 퇴계 종가로 가신 분은 아실 게고요.” 실로 막힘이 없다. 종손의 처가는 대구 옻골의 백불암 최흥원 후예다. 노종부는 며느리 경주 최씨에 대해 소개하기를, “백불암 지하에서 왔는데, 백불암 손자가 우복 선조의 6대손인 입재 할뱀의 따님이십니다.

그래서 그 어른의 8대손인 춘목이는 제 댁과 촌수로는 16촌인 셈이지요.”라고 한다. 두 가문의 세의(世誼)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대화 말미에 종손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다른 지방에 가보니 종손이 대종회 총무를 하는 데가 있더군요. 월급을 받아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문화적인 차이라고 하기에는 전통과 현대가 너무나 판이했던 모양이다. 종손은 봉제사 접빈객 할 고유의 소임이 있고, 대종회나 종친회는 정관에 정한 바 역할이 있다.

표리와 상보적인 관계로 상호 존중과 조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종손과 대화하면서 필자는 종가를 반듯하게 지키겠다는 다짐을 읽을 수 있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보낸 자료들은 ‘명가의 고문서2, 선비가의 학문과 벼슬(진주 정씨 우복 종가)’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2004년에 컬러판으로 간행되었다.

필자는 우복가의 진장(珍藏) 편을 펴서 조선 중기의 나옹 이정(1578-1607, 강호에 노닐며 물아일체의 경지를 꿈꾸다 30세에 요절한 화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산수첩(山水帖, 총8폭의 산수화)을 보다가 그 그림의 격에 감탄했다. 우복 또한 과안(過眼)했을 그 그림들은 그야말로 진장(珍藏)이요 비장(秘藏)이다.

또 다른 작품으로는 사위인 동춘당 송준길 필첩이 있다. 종택 주변의 풍광을 시(詩)로 노래한 ‘우산(愚山) 잡영(雜詠)’은 무르익은 동춘당의 필법을 여실히 보여주는 명품이다. 종손은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이는 상엽(相燁, 초등학교 4학년)이다.

● 정경세 1563년(명종18)-1633년(인조11) 본관은 진주. 자는 경임(景任), 호는 하거(河渠), 우복(愚伏) 시호는 문장(文莊)
국왕 비판도 서슴없이… 지사의 상소문은 치세의 전범

우복의 삶은, 동문 수학한 벗인 창석 이준이 지은 묘지명, 용주 조경이 지은 신도비명, 하계 권유가 지은 묘표, 동춘당 송준길이 지은 행장,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시장(諡狀, 시호를 청할 때 쓴 글) 등에 잘 기록되어 있다.

물론 연보와 언행록을 통해서도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정리한 행장(行狀) 한편만도 1만 4천 글자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내용을 파악하기란 만만치 않다.

우복의 71년 평생은 순탄하지 않았다. 16세에 생원 진사 초시에 합격한 뒤 18살에 서애 류성룡이 상주목사로 부임하자 나아가 문하에 들었다.

21세 때 전의 이씨와 혼인했으나 이듬해 상처한 것, 63세 때는 문과에 급제한 맏아들을, 65세 때는 둘째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것, 그리고 몇 번의 무고와 삭직 등의 시련이 있었다.

그리고 문과 급제 이후 관료로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미증유의 양대 난리를 겪었다. 그 사이에 광해군의 난정에 말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복의 진면모를 보여주는 사례 한 가지를 소개할까 한다. 조정 대신(大臣)으로서의 사체(事體)가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것을 알려주는 상소문이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46세) 5월 2일, 대구부사 신분으로 광해군의 구언에(求言) 응해 글을 올렸다. ‘곧게 진달하고 통렬하게 지적해 내쳐서 조금도 회피한 바가 없었다’는 평을 받은 그의 상소문은 그러나 ‘세상을 떠난 부왕(宣祖)의 실정을 악의적으로 지적했다’는 오해를 받았고, 국왕의 노여움은 극에 달했다.

이에 편승한 일부 신하들은, 그를 잡아들여 국문한 뒤 법에 의거 처단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만언소(萬言疏)’라 지칭된 장편의 상소문을 차분히 읽어보면서, 이렇게 논리적이고 충정에서 우러나온 간곡한 문장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몇 번이나 놀랐다.

상소문의 압권은 이 대목이다.

“20여 년 전에는 사대부의 집에서 남몰래 궁궐로 드나드는 자가 있으면 청론(淸論)이 침을 뱉으며 더럽게 여겨 마치 자신들을 더럽힐 것 같이 보았습니다.

그런데 10여년 이래로는 조정에는 청의(淸議)가 없어지고 요행(僥倖)이나 바라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이러한 짓들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대부 집은 이제 겨우 약간만 남았을 뿐입니다.

이에 궁궐은 저자거리 같이 되어 각기 문호(門戶)를 세운 채 뇌물을 받고 있는데, 변방 장수나 수령을 하는 데에도 모두 정해진 가격이 있고, 상을 줌과 형벌을 내림이 공도(公道)를 따르지 않아 결국에는 군신(君臣) 상하(上下)가 서로 인의(仁義)를 저버린 채 이기심만 품고 만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랫사람이 임금의 잘못을 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윗사람도 신하의 죄악을 바로잡지 못한 채 아첨하고 의심하는 더러운 풍조가 성행하여 선왕(先王, 돌아가신 왕 즉 광해군의 선친) 말년에 이르러서는 조정의 혼탁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의 발언은 자유 민주주의 시대에 있어서도 정강정책을 계승한 국가 최고 통치권자를 향해 지난 공화국의 잘못을 이처럼 논했다면 신랄한 비판은 물론 신분상의 불이익까지 당할 수 있는 수위다.

광해군은 전교(傳敎)를 통해 이 내용을 ‘패만(悖慢)한 말’이라고 규정하고 ‘임금을 버리고 간사한 자들과 한패거리가 되었다’고 그 ‘죄악(罪惡)’을 열거했다.

국왕은 우복에 대한 응징을 ‘선왕에 대한 치욕을 씻는 일’로 인식했을 정도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선 우복은 극적으로 대신들의 구명을 통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이가 백사 이항복이다.

그는 극구 포용하고 감쌀 것을 국왕에게 주문했다. “소신(小臣)의 망령된 말 한마디가 선왕(先王)의 덕에 무슨 해가 되겠습니까? 파리를 보고 성을 내며 칼을 뽑는다면 신위(神威, 임금의 위엄) 허비할 뿐입니다.”

백사의 논리는 지금에서 보면 초라하기 그지없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것은, 우선은 충직한 신하 한 사람을 살리는 것이 급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백사의 헌의(獻議)는 주효해 극적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백사는 폭정이 극에 달했던 광해군10년(1618, 63세)에 인목대비 폐위를 반대하는 직간을 하다 북청 땅으로 유배의 길을 떠나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광해군이 집권 벽두에 이 상소문을 마음에 새겼다면 자신은 물론 국정의 혼란도 없었을 것이다.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후대에 이 상소문은 나라를 잘 다스리는 하나의 전범(典範)으로 기려졌다.

숙종6년(1680)에는 전 대사간 이원록(1629-1688, 광주 이씨)이 인조 때의 유신(儒臣) 우복의 상소문 몇 조목을 새로 정서(淨書)해 올려 좌우에 두고 살피라고 건의했고, 영조2년(1726)에는 영의정 장암 정호가 군신간의 도리가 어떠해야 하는 가를 논하면서 우복의 이 상소문 구절을 인용해 상소했다.

묘소와 신도비, 재궁은 상주시 공검면 부곡리에 있다. 그곳은 삼한시대의 대표적 수리시설인 ‘공검지’와 인접한 지역이다.

사후에 개령(開寧, 경북 김천시 지역)의 덕림서원(德林書院), 경산의 고산서원(孤山書院), 대구의 연경서원(硏經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에 각각 제향되었다. 조선 고종 때에는 문묘에 배행할 것을 주청한 사림(士林)들의 상소도 3차례 있었다.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