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는 이들에게 동계 정온 선생이 어떤 분인가? 하고 물으면 청음 김상헌보다 훨씬 ‘생소한 역사인물’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나마 근자에 조용헌, 이연자 두 분에 의해 동계 종가가 소개되어 다행이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역사인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청음과 동계를 ‘도동지합(道同志合, 도와 뜻이 같다)’의 인물로 알고 있다.
한편으로는 청음에 비해 지명도나 자손들의 번성함에 있어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못내 아쉽게 여겨온 바 있다. 동계의 경우, 현손(玄孫) 대에 이르러 정희량(鄭希亮, 해주 정씨인 虛庵 鄭希良과는 다른 인물)이라는 역적이 나 멸문지화의 위기를 맞았다.
역사적으로 무신란(戊申亂, 1728, 영조4)이라고 불리는 국왕 정통성(영조)에 대한 강한 문제제기의 중심에 정희량과 이인좌가 있었다. 이는 반역이었다. 조선 5백년 역사상 전주 이씨 왕족에 대해 반역을 기도한 몇 안 되는 씨족이 초계 정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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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이 다른 곳도 아닌 만고 충신인 문간공 동계 정온 선생 댁이다. 수많은 이들의 구명운동으로 인해 영조 대에 야기된 불상사는 정조 대에 이르러 국왕의 결단으로 종가의 향화(香火)를 잇게 되었다.
충신의 집이 후손 중에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남으로 인해 대를 끊게 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통해서였다. 이에 비해 청음 집은 그 자손들의 혁혁함에 있어 달리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동계는 만고충신으로 역사에 길이 남았다. 그의 문집을 넘기다 ‘산성차자(山城箚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문자 그대로 ‘남한산성에서 올린 신하의 글’이다. 산성차자는 모두 4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충심(衷心)을 담았기에 하나같이 감동적인 글이다. 3번째 차자에서는, “군주의 욕이 극에 달하였으니 신하로서 죽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이리저리 미루며 참고 있는 것은 다행스럽게도 전하께서 확고하게 성 밖으로 나가시려는 뜻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신이 어찌 얼른 죽을 수 있겠나이까?”라고 썼다. 그러나 네 번째 차자에 이르러서는 상황이 급변한다.
화의를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를 따라 국왕이 성 밖으로 나가 항복함에 동계는 망설임 없이 자결을 택한다.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쓴 글이라 더없이 애절하다.
■ 국왕이 항복하자 망설임 없이 자결 선택
“가만히 생각건대 신의 자결은 참으로 전하께서 당하는 오늘날의 일을 차마 볼 수 없어서였습니다만, 실오라기 같은 쇠잔한 목숨이 사흘이 되도록 끊어지지 않고 있으니, 신의 생각으로도 참으로 괴이합니다.
최명길이 이미 전하로 하여금 신(臣)이라고 일컫고 성문 밖으로 나가 항복하게 하였으니, 저들과는 군신의 명분이 정해지고 말았습니다. 신하는 임금에 대해 그 뜻을 잘 따라 받드는 것만으로 공손함을 삼는 것이 아니라 다툴 만한 것은 다투는 것이 옳습니다. 후략(後略)”.
뒷부분에는 청나라 군사들에 대해 조선이 명나라와의 의리를 굳게 지켜야 하는 당위를 설명해 설복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편 뒤, 그러나 신하로서 어가를 끝까지 호종하지 못함을 죄스럽게 여긴다는 글이 이어진다. 동계 선생의 문집 연보(年譜) 부분을 보니, 칼날이 배 속 2촌(寸) 깊이로 뼈에까지 닿아 유혈이 낭자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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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도 끝난 뒤 이어지는 사나운 빗소리를 들으며 남한산성이 지척인 서울 강남땅에서 370여 년 전의 그 원통한 사연을 곱씹어봄에 처량한 심사에다 울분까지 치밀어 마음이 편하지 않다.
더욱 원통하고 분한 것은 이러한 충절에서 나온 자결을 달리 이해해 험한 입을 마구 놀려댄 이들까지 있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15대 종손 정완수(鄭完秀, 1942년생) 씨가 필자의 고향 경북 영주에 우거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풍편에 들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더욱 만나보고 싶었다. 그리고 어떤 이는 경주에 살고 있다 했다. 자료에는, 종가는 경남 거창에 있고 그 집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내용을 알고 보니, 그렇게 된 데는 사연이 있었다. 먼저 종손이 경주에 산다는 것은 사실이다. 경주는 종손에게 타향이 아니다. 종손의 외가는 12대를 이어 만석꾼 집이라는 경주 최 부자 집이다. 종손의 모친 최희(崔熙, 1926년생) 여사는 15세에 동계 종가로 시집와 16세에 경주 친정에서 종손을 낳았다.
그래서 종손은 어린 시절을 외가에서 자랐고 경주 황남초등학교에 입학해 다니다 거창초등학교로 전학했다 한다. 종손은 거창중, 거창고를 거쳐 대구대학교(현 영남대학교 전신) 경제학과(59학번)를 졸업했다.
군에서 제대한 뒤 (주)유공에 입사해 서울 본사와 부산, 울산 공장 등지에서 근무하다 경북 영주출장소로 전근해 28년간 근무하다 정년을 5년 앞두고 퇴직했다. 선대의 분묘가 있는 영주와의 긴 인연은 그래서 끝이 났다.
종손의 선친인 정우순(鄭禹淳, 1921년생) 씨는 지역 교육계의 원로였다.
거창교육장, 함양교육장을 지낸 뒤 거창여고에서 정년퇴직할 때까지 45년간을 교육계에 헌신했다. 모친인 최희 여사는 언론과 잡지에 전통음식의 매운 솜씨로 이름이 난지 오래다.
필자에게는 안동 하회마을 충효당(忠孝堂, 서애 류성룡 선생의 종택) 종부인 최소희 여사의 큰언니라서 더욱 친밀한 느낌이다.
하회 충효당 종부는 가양주를 빗는 솜씨가 빼어난데, 언니인 동계 노종부는 어떠한지 궁금했다. “우리 어매는 특별히 내세울 가양주 비법은 없고요, 다만 제주를 빗는 정도지요. 세상에서는 음식 솜씨가 빼어나다고들 합니다. 보통 양반가의 음식은 물론이고, 된장과 고추장 맛은 일품입니다.” 필자는 이 집 종부(柳星奎, 1947년생)가 퇴계학의 정통을 이어받은 정재 류치명 선생의 종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재 종가에서 내려오는 가양주인 송화주(松花酒,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20호, 기능보유자 이숙경)의 맥과 종손의 외가에서 이어오는 가양주인 경주 교동법주(중요무형문화재 제86-3호, 기능보유자 배영신)의 맥을 동계 종가에서 이어받아 고유한 전통 가양주를 이루었을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음식, 그 중에서도 된장과 고추장 그리고 간장의 빼어난 맛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음식 맛은 장맛’이라는 말이 있다. ‘간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거의 없으면서도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다’는 평을 받은 이 집 간장보다 필자는 그 간장을 떠내는 된장 맛을 보고 싶었다.
마침 종부 류 여사는 내년에 환향을 앞두고 시어머니의 된장 맛을 여러 사람들에게도 살짝 보여주고 싶어 올해 시험 삼아 된장을 좀 넉넉하게 담았다 한다. 종부의 바람대로 내년부터 유래 있는 종가의 된장 맛을 보다 쉽사리 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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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손은 2남 1녀를 두었다. 맏아들 택현(宅炫, 1973년생) 씨는 객지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근자에 경주로 내려와 함께 살며 사업을 하고 있다. 맏손자 민기(珉基, 2006년생)는 아직 어리다.
종손을 처음 뵙고서 필자는 ‘법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이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지손들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 모두 따뜻하게 대하는 품이 넓은 사람일 것이다. 내년에 환향할 계획에 대해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늦은 셈이지요. 노모 혼자 그 큰 집을 지키시느라 힘이 많이 드셨어요. 저도 객지살이 하면서 제사나 향사 때마다 오가느라 몸과 마음 모두 편안하지 못했어요.
또 요즈음은 집수리를 하느라 아주 어수선합니다. 앞으로 2, 3년 더 해야 완전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학중앙연구원에다 진작 위탁해둔 유물 유품들도 찾아서 지역 박물관에 합당한 공간을 마련했으면 하구요.”
동계는 거창을 대표하는 인물이며 또 종가 역시 국가문화재인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것만 보아도 그 위상을 알 수 있다. 1,500평의 대지에 임좌(壬坐)로 앉은 70여 칸의 당당한 고가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현판이 붙어 있다. 범상하지 않은 글씨에 그 의미 또한 알 수 없어 유래를 물었다.
“현판 글씨는 의친왕(義親王, 李堈:1877-1955)이 1909년 이 집에 와 40여일 정도 묵으셨는데, 그 때 써준 것입니다.” 이강 공은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서울에서 교분이 두터웠다 한다.
몇 해 전에는 이강 공의 아들인 가수 이석 씨가 종택을 방문해 그 유래를 듣고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선친이 주무셨던 방바닥에 몇 번이나 절을 했다고도 한다. ‘풍수지탄(風樹之嘆, 효자가 어버이를 그리는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모와(某窩)’는 ‘아무개 집’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동계가 남한산성의 치욕을 뒤로한 채 낙향 해 작은 집을 짓고 세상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은거했던 ‘모리(某里)’와 관련이 있다.
이를 자세히 알 수 있는 자료는 동계가 쓴 ‘모리구소기(某里鳩巢記)’라는 글이다. ‘모리에 지은 비둘기 집과 같은 아주 보잘 것 없는 집에 대한 설명문’이라는 의미다. 이 글을 읽어보면 동계의 은거가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알 수 있다. “나는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뒤로 몸도 병들고 늙어 다시는 이 세상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평생 늙어 죽을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 찾다가 마침 이 마을을 만났다.
그래서 내가 그 마을 이름이 아무개 마을인 것을 좋아해 몇 개의 나무를 구해 서까래를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비둘기 집처럼 보잘 것 없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이때가 정축년(인조15, 1637)으로 병자호란 이듬해로, 인조가 송파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한 해이며, 자결을 시도한 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집에 입주한 것은 이듬해였는데, 이때의 주요한 이삿짐은 주자(朱子)의 글이 적힌 주자서(朱子書)였다 한다. 69세의 국가 원로대신이 대의명분에 따라 자결을 단행했고, 그 깊은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궁벽한 산중에 보잘 것 없는 집을 지어 은거한 것이다.
왕족의 피를 타고났으나 일제 침략과 그 뒤 광복(光復)이라고는 하지만 조선왕조로 돌아가지 못해 불우한 왕손으로 떠돌다 세상을 마친 의친왕 이강 공과 그의 아들 ‘가수 이석 씨’로 알려진 부자가 시공을 넘어 조우하기도 했던 동계 종가 사랑채에서 그날의 참담한 역사를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동계의 비둘기 집 기문을 읽으면서 머리로는 가수 이석 씨의 노래인 ‘비둘기 집(비둘기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이 절묘하게 겹쳐졌다.
● 정온 1569년(선조2)-1641년(인조19) 본관은 초계(草溪, 八溪).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고고자(鼓鼓子), 시호는 문간(文簡)
남한산성 척화론의 양대 산맥… 목숨 걸고 왕명에 저항하기도
미수 허목은 그를 위해 쓴 행장 말미에서, “의(義)가 아니면 어울리지 않고 도(道)가 아니면 나아가지 않았으며, 의를 보고는 망설이지 않았고 큰 환란을 당하여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절개를 지켜 의를 취하고 죽음을 보람으로 여겼으며, 몸을 깨끗하게 하여 산속에 은거함에는 모든 세상이 다 그르다 해도 원한도 분노도 없었다. 아, 옛날의 성인이나 현인과 비교해 보아도 그 행동과 사업이 밝게 드러났으니, 해와 달과도 그 빛을 다툴 것이다.”라고 요약 했다. 아낌없는 기림이라서 달리 그의 삶을 설명할 필요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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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일생을 살피면서, 잘 알려진 남한산성에서의 절의에 못지않은 행적으로, 계축옥사(癸丑獄事, 광해군5, 1613)에 저항한 내용이 돋보인다.
동계는 이 사건으로 희생된 선조의 14왕자 중 막내며 유일한 적자(嫡子)인 영창대군을 죽인 강화부사 정항을 목 베고 영창대군(1606-1614)의 작위를 축복함과 아울러 예장(禮葬)할 것을 주청했다.
당시 정세로 보면 이는 현실을 도외시한 무모한 도전이었다.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든 형국이다. 그러나 동계는 그것이 의리에 맞고 그래서 신하로서 당연히 가야 할 길이라고 보았다. 때문에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피하지 않았다.
광해군의 의도에 편승해 계축옥사를 주도한 대북파(大北派)의 좌장인 정인홍과 이이첨은 소북파(小北派)의 영의정 유영경과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인 김제남을 사사했고, 인목대비를 서궁(西宮)에 유폐함과 아울러 강화도로 위리안치(圍籬安置, 가시울타리를 쳐서 중죄인을 가둠)한 영창대군을 죽이기에 이른다. 당시 영창대군은 만 8살이었다.
누구 한사람 감히 나서서 막지 못하던 상황에서 동계 선생은 분연히 일어나, “철모르는 어린아이가 반역을 꾀한 적이 있는가?”라고 정면으로 저항했다. 이는 저들에게는 뼈아픈 일격이었다.
‘8살 어린아이가 무리를 규합해 반역을 꾀했다.’ 이는 너무나 논리에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본래 계축옥사를 일으킨 수괴 중 정인홍은 남명 조식 선생의 수제자일 뿐 아니라 동계 선생의 스승이기도 했다.
동계는 사제의 연을 단번에 끊었다. 이에 저들은 “대비를 함께 폐위하기로서니 또 누가 안 된다고 하겠소.”라며 강경하게 맞섰고, 끝내 그 뜻을 이루고 말았다.
이에 동계는 작심한 듯 그 부당함을 상소문을 통해 아뢰었다. 광해군은 즉시 동계를 처형하려 하였으나 영의정 기자헌, 우의정 정창연, 원임 대신 이원익, 심희수 등이 극구 죄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청했다.
그러나 대역(大逆)의 죄로 논해야 한다는 주장이 비등해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온갖 고초를 당한 뒤 제주도 대정현으로 유배의 길에 올랐다. 이후 10여년의 세월이 덧없이 흘렀다.
역사적으로 추사 김정희 역시 대정현으로 유배당했는데, 그는 유배에서 풀린 뒤 동계 선생이 머물렀던 곳을 찾아 그 얼을 기렸다 한다.
면암 최익현 역시 제주도에 유배되어 역사적으로 그곳에 유배되었던 오현(五賢, 다섯 분의 어진 이, 충암 김정, 규암 송인수, 청음 김상헌, 동계 정온, 우암 송시열)을 시로써 기린 바 있다.
미수가 쓴 행장에는 저간의 정황을 문답식으로 박진감 넘치게 묘사하고 있다. 조금의 물러남도 없이 목숨을 걸고 겨루는 한판이라서 읽는 이의 간담까지 서늘하게 한다.
역사적으로 동계는 청음과 그 의(義)를 수립함에 있어서 ‘한 몸(一體, 仁祖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고립무원(孤立無援)의 남한산성에서 척화론(斥和論)을 편 양대 산맥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의 일생을 비교해보았다. 동계가 1년 맏인데, 청음이 20세에 진사,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른데 비해 동계는 36세에 진사, 42세에 문과에 급제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연배이면서도 동계가 문과에 급제했을 때 청음은 이미 홍문관 직제학으로 정3품 당상관에 올라 있었다.
그런데 인조2년(1624, 동계 56세)에 이르면 동계가 형조참판(정2품)인데 비해 청음은 이조참의(정3품) 직을 제수받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뒤 동계가 이조참판에 그친 것에 비해 청음은 크나큰 고초를 겪기는 했지만 인조24년에 좌의정에까지 이른다. 동계는 인조19년 6월 21일에 73세를 일기로 시골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이 때 청음은 삭탈관직 된 채 고향인 안동 풍산 서미동에서 은거하다 심양으로 압송된다.
묘한 것은 청음이 은거지로 택한 고향 땅 학가산(鶴駕山) 오지 마을 이름이 서미동(西薇洞, 본명은 西美洞)이었고 동계는 은거지로 삼은 마을 모리(某里)에서 차조를 손수 재배해 자족하며 명나라에서 발행한 숭정10년(인조15, 1637, 국왕이 청나라에 항복한 해) 책력에다 쓴 시에, ‘그저 꽃잎을 보고 계절이 바뀐 줄 아네(只看花葉驗時移)’라고 해, 역시 백이숙제의 절개를 지키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시계(時計)는 숭정10년에서 멈추었다. 후손들은 그래서 불천위 제사를 모실 때면 고사리와 차조를 주요 제물로 쓰고 있다 한다.
지금도 모리의 선생 유촉지에 남아 있는 ‘모리재(某里齋)’에는 후손들이 그 고결한 정신을 기려 지은 문루인 ‘화엽루(花葉樓)’가 당당하게 서 길손을 맞고 있다.
동계가 남한산성에서 남긴 몇 편의 시는 그 충절의 정신이 담겨 있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연려실기술, 대동야승 등 서책은 물론 조선왕조실록에까지 당시에 지은 시(詩)와 찬(贊) 올라 있다.
“임금의 욕됨이 이미 극에 이르렀는데(主辱已? 신하로서 어찌 이렇게 더디 목숨 바치나(臣死何遲)/薨?버리고 곰 발바닥을 취할 때(舍魚取熊) 지금이 바로 그렇게 할 때로다(此正其時)/임금 모시고 항복하러 성 나가는 것(陪輦投降) 난 정말 부끄럽게 여기니(余實恥之)/칼 한 자루로 인을 이루리니(一劍得仁) 죽음 보기를 집에 돌아가듯 하리(視死如歸).”
이 글은 69세 노인이 자결하기 직전에 입고 있던 옷에다 쓴 글이다.
글 전체에 비장미가 감돈다. 이 때 청음 역시 목을 매어 자결을 시도했다. 여기서 ‘사어취웅’은 맹자(孟子)에 나오는 고사다. ‘곰 발바닥 요리와 생선 모두 내가 원하는 바이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한다면 나는 생선을 버리고 곰 발바닥을 가지겠다.
생(生)과 의(義)를 모두 내가 원하지만 두 가지를 함께 얻지 못할 바에는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겠다.’는 구절에서 나온 말이다. 맹자의 이 구절은 ‘사생취의(捨生取義, 구차한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함, 맹자 본문에는 ‘舍’로 표기됨)’이라는 사자성어를 낳았다.
척화(斥和)와 주화(主和) 가 첨예하게 대립될 때 어느 편도 논리가 없지는 않지만 보다 옳은 길을 택해 후회 없이 가겠다는 말이다. 이는 현재도 여전히 유효할 것 같다.
이 글은 왕조실록과 동계선생 문집 연보, 연려실기술에 모두 동계의 작품으로 올라 있지만, 유독 대동야승에 실린 조경남이 쓴 속잡록(續雜錄)에는 청음의 글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너무나 명문이라 구전(口傳)한 것을 적다가 착오를 일으킨 것 같다.
학자로서도 명성이 있었던 선생은 문집 8책을 남겼다. 서문은 용주 조경이, 발문은 미수 허목이, 속집 서문은 유관 김흥근이, 연보 발문은 눌은 이광정이 각각 지었다. 선생은 사후에 거창의 도산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함양의 남계서원, 남한산성의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