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산 유람 기회를 포착하다
나는 젊었을 때부터 나라의 명산을 대부분 유람하였지만 유독 관동만은 가보지 못하였다. 관직이 갑자기 높아지고 나이가 들수록 몸 또한 자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전에 계획했던 것이 더욱 어그러지니 항상 안타까울 뿐이었다.
1603년(계해, 선조36), 함흥부에 있는 화릉2)을 수리할 역사가 있었는데 반드시 예관이 봉심해야 했다. 당시 내가 예조판서였기 때문에 그 곳에 가기를 힘써 구하니 조정의 의논도 이를 막지 못하였다. 대개 화릉의 수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안변으로부터 시작하여 흡곡, 통천을 거쳐, 총석정, 삼일포를 두루 돌고 유점사를 거쳐 금강의 내외산을 모두 답사하려 함이었다.
석봉과 함께 떠나는 함흥길
8월 1일
임금에게 출발인사를 하였다. 내가 겸직하고 있는 세자 빈객과 비변사의 유사당상을 사임하고자 하였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께서는 예조판서가 멀리 나가서는 안 된다고 계문을 올려 만류하고자 하였으나 내가 시일이 촉박하다고 말하니 조정에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石峰 韓景洪(1543-1605, 이름은 濩) 역시 흡곡 수령으로 발령을 받아 출발인사를 드리고 나와 함께 동문 밖에서 잤다. 나는 노비를 거느리지 않고 단지 피리부는 악공 함무쇠[咸武金]만을 데리고 갔다. 내가 석봉에게 이르기를
“이번 행차에 정말 하늘이 나에게 좋은 인연을 주셔서 그대가 東道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는 다행 중에 다행이오. 더구나 簡易 崔立之(1539-1612, 이름은 岦)가 간성의 수령으로 있어 나의 행차를 들으면 반드시 와서 서로 만나 함께 선산(금강산)에 들어가게 될 터이니 천고에 없을 멋진 일이 아니겠는가. 보름 후에는 내가 업무를 마치고 돌아올 것이니 그대는 먼저 가서 기다리시게나.”
하니, 석봉은
“저는 단지 어른의 막객인데 지금 다행히 영외로 함께 나가게 되어 선경에서의 경치를 보고 지은 글이 배가 될 것이니 어찌 지난번 함께 중국 사신으로 간 때의 기쁨에 뒤지겠습니까?”
하였다.
신안역에 도착하였다. 역졸이 앞에 놓인 왼쪽 길 하나를 가리키면서
“여기서부터 통구(김화)에 이르러, 돌아서 단발령에 이르는데 길은 겨우 백여 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흥이 일어나 가마를 멈추고 시 한 수를 짓고 무쇠를 시켜 피리 한 곡조를 불며 갔다.
회양에 도착하였다. 태수 한수민이 술상을 차려 놓고 여행의 피곤함을 위로해 주었다. 술상이 매우 훌륭하니 나는 시 한 수를 벽에 적어 주고 그 곳을 떠났다. 시의 내용은 다른 글에 실려 있다.
화릉 수개를 마친 후
8월 11일
함흥부에 도착하였다.
8월 13일
화릉의 수개 역사를 마치었다.
8월 14일
함경도 관찰사 한면숙(1543-1621, 이름은 孝純, 호는 月灘)이 풍패관에 술상을 차려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그 지방 수령들이 모여 있었다.
8월 15일
비가 많이 내려 달을 보지 못하였다.
8월 16일
느지막이 날씨가 개었다. 출발하고자 하였으나 함경감사가 한사코 말리면서 대신 만세교를 보라고 청하였다. 포시(오후3-5시)에 함께 낙민정에 올랐다. 정자는 성밖 1리쯤 떨어진 곳에 있었다. 정자는 전쟁통에 화재로 불타고 단지 그 터만 남았다. 매우 시원하였다. 만세교는 그 아래에 있었는데 강의 수심이 한 길쯤 되고 그 너비와 깊이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쟁반에 담긴 물처럼 잔잔하였고 좌우의 흰 모래는 눈처럼 희었다. 다리의 길이는 3리쯤 되었다. 지난 밤에 많이 쏟아졌던 비가 개니 달빛이 마치 그림같이 아름다웠다. 주연을 파하고 걸어서 내려왔다. 다리 위에 앉아 무쇠를 시켜 피리를 불게 하고 사방을 바라보니 물 위에 떠있는 듯 탁 트이고 아득하여 마치 목밍 공중에 걸려 있는 듯하였다. 달빛은 물 속에 어리고 물결도 일지 않았다. 심신이 맑아지니 술기운이 도로 깨었다. 다시 술자리를 베풀어 술잔을 몇 차례 돌리니 문득 기분이 좋아져 돌아갈 생각이 사라졌다. 술자리엔 다른 기악은 없고 단지 피리소리만 맑게 용궁에까지 퍼졌다. 정말 아름다운 정취를 더하였다. 조금 있으려니 작은 배 4, 5척이 기생을 태우고 북을 치며 피리를 불며 가까이 와서 다리 아래를 왔다갔다 하였다. 노랫소리가 서로 답하였다. 춤추는 그림자가 하늘하늘 비추니 이 또한 멋진 볼거리였다. 뱃사람이 그물을 던져 고기를 낚으니 연어도 있고 방어도 있었다. 큰 것은 한 척쯤 되고, 작은 것은 손가락 길이 정도 되었다. 회쳐 먹거나 구워 먹으니 정말 특별한 맛이었다. 술잔이 얼마나 자주 내 손에 이르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간성 군수 최입지와 통천 군수 안경용(이름은 昶 호는 石泉), 흡곡 현령 한경홍 등이 날마다 편지를 보내 여행일정을 물어 왔다. 그 밖에 관동 수령의 공문서를 가지고 나의 일정을 묻는 자들이 줄을 지어 도착하였다. 한면숙은 내가 금강산 가는 길에 여기저기 편지를 보내는 모습을 보고 농담하며 이르기를
“이 관직을 버리고 어른을 따라 나서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습니다. 내가 이미 어르신과 동행할 수 없으니 차라리 조정에서 급히 공을 불러들여 어른도 이 여행을 못하게 되었으면 합니다.”
하여 서로 껄걸 웃고 잔치를 파하였다.
영흥에 도착, 오랑캐 내침소식을 듣다
8월 17일
함경도 관찰사 한공과 이별하였다. 영흥에 도착하였다.
8월 18일
북병사가 급한 장계를 가지고 지나갔다. 함경감사 공문서도 마침 도착하였다. 오랑캐 수백 기가 종성을 포위하여 종성부사 鄭曄(자는 時晦)이 포위당했는데 생사를 알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놀라고 두려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안변에서 금강산 유람을 포기하다
8월 22일
안변에 도착하였다. 안변부사 남자유(이름은 以信, 호는 直谷)가 그 동생 자안과 함께 계당에 술자리를 베풀었다. 그 다음 날에도 머물러 있었다. 나는 안변부사의 어머니를 위하여 생일잔치를 베풀었다. 이틀 더 머무르며 북쪽 소식을 기다렸다. 관동 각읍 사람들도 모두 여기에서 기다렸다. 최입지가 고성에 도착하니 도사와 은계 찰방이 인마를 내어 흡곡에서 기다렸다. 다른 읍 수령들도 각각 경계선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처음에는 종성에 쳐들어온 오랑캐가 별 볼일 없는 도적이라 오래지 않아 격퇴시키리라 생각하며 안변에 머물러 소식을 기다렸다. 그러나 급보가 날마다 날아드니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해지고 두려워 떨었다. 내가 지난번 출발할 때 겸직하였던 비변사의 유사 당상 직책을 내놓지 않았는데, 비변사에서 지금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바쁠 것을 생각하니, 돌아오는 길에 금강산에 가는 것이 마음에 편치 못함이 있어, 마침내 여러 태수에게 답장을 보내어 산에 가지 못함을 사과하였다.
오랑캐 격퇴소식을 듣다
8월 25일
직선으로 난 길을 따라 철령을 지났다. 40년 동안 고대해 마지않던 계획이 실현될 기회를 만났는데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여 툴툴거리며 갔다. 철령에 올라 멀리 금강산을 바라보니 홀홀히 마음이 씁쓸하여 마치 무엇을 잃은 것 같았다. 포시쯤 회양 앞 냇가에 도착하였더니 급보가 북쪽으로부터 와서 적이 격퇴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안변에서 조금 더 지체하지 않았던 것이 한스러웠다. 곧바로 가마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하지 못하였다.
회양부에서의 결심
저녁에 회양부에 들어갔다. 부사가 나를 만나고자 산으로 간 지 3일이 되었다고 한다. 빈 관사에 근심스레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이 곳에서 산중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물었더니 아전이,
“화천 길을 따라가면 180리쯤 되고 통구 길을 따라간다면 160리지만 산길이 매우 험합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예조좌랑 이형원을 불러
“나의 이번 행차는 처음부터 아주 기이하도록 약속되었나 보다. 드디어 조물주의 시기를 받아 뜻밖에 장애를 만났으니 진실로 천 년에 한 번 있을 슬픈 일이다. 만약 입산하지 못하고 속세로 돌아가 버린다면 한을 품고 저세상으로 떠나게 될 것 같다. 지금 북쪽 오랑캐가 물러갔다 하니 내가 서울로 돌아간다 하여도 바쁜 일이 없을 것이다. 3일 정도만 소요한다면 가히 금강산을 두루 답사할 수 있어 나의 처음 마음을 풀 수 있을 것이다. 나의 흥미가 이미 발동하였으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지금 새벽닭이 울기 전에 말에게 꼴을 먹이고 출발하려 한다. 하루면 산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인데 그대는 나를 따르겠는가 말겠는가?”
하니, 이형원이 이르기를
“비록 몸은 매우 피곤하나 어찌 감히 따르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드디어 사람들로 하여금 3일치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고 하루치 밥은 각자 짊어지도록 하여 주방장 등 불필요한 수행원은 모두 없에게 하였다.
첫새벽에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출발하였다. 신안역에 도착하였다. 이미 40여 리를 왔으나 하늘은 아직도 훤해지지 않았다. 이 곳은 지난 번 올 때 수레를 세워 길을 물었던 곳이다. 조금 휴식을 취하고 말에게 꼴을 먹이려 하는데 관인 6, 7명이 길 왼편에서 맞이하며 절을 하였다. 물으니 바로 간성, 통천, 흡곡 사람들이었다. 모두 최입지, 안경용, 한경홍 등이 내가 곧바로 경성으로 갔다고 듣고 창연히 각기 흩어져 편지를 띄워 안부를 묻는 것이었다. 또 술과 안주를 보내왔는데 모두 나를 대접하고자 함이었다.
한경홍은 별도로 편지를 보내왔다. 그 편지에 이르기를
“흡곡 부로들이 모두 공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있던 터에 공께서 이 곳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하여 경내를 청소하여 공을 맞이하고자 하였는데 공께서 곧바로 돌아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정말로 섭섭해하였습니다. 모두 길에서나마 뵙고자 하여 나왔습니다. 이에 장로 3인으로 하여금 술과 안주를 가지고 (공을) 뵙도록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아마도 내가 경자년(1600)에 호조판서로 있을 때 흡곡 백성들이 상소하여 세금을 감해 달라고 청한 적이 있는데, 당시 나는 조폐에 시달리고 있는 그들이 가엾어 임금께 아뢰어 세금을 감면해 주었기 때문인 듯하다.
젊은이와 백발 노인들이 내게 절하며 술을 올렸다. 각각 몇 잔씩 마시니 나도 모르게 취하였다. 세 지방 태수가 보낸 술과 안주는 모두 역졸에게 지게 하여 산행의 음식으로 쓰게 하였다. 역촌에 있는 가교에서 머물렀다. 두 마리의 건강한 말을 골라 갈아타고 출발하였다. 나의 수행인으로는 피리부는 함무쇠와 잔심부름할 아전 장응선, 그리고 화공 표응현이었다.
비로소 금강산 유람을 시작하다
신안역에서 아침에 출발하여 30여 리 가서, 통구현에 도착하였는데 해가 아직 높이 떠 있었다. 백성들은 깊은 산골짜기에 살고 있었으며 골짜기는 절조하여 이미 별세계였다. 여기서부터 산길은 끊기고 나무로 꽉 막혀 있어 길을 뚫으며 앞으로 나가야 했다. 큰 고개 셋과 작은 고개 다섯을 넘어 단발령에 오르니 갑자기 수많은 백옥이 하늘 가운데 쌓여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세상에 전해 오기를 장차 이 산을 유람하려던 어떤 사람이 단발령에 도착하여 멀리 바라보다가 문득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고 하여 고개의 이름을 단발령으로 했다는 것이다.
신안으로부터 이 곳에 이르러 백여 리를 지나니 수많은 산들이 첩첩이 겹쳐 있어 마치 앞을 가리고 호위하는 듯하였다. 이 곳에 이르러 비로소 금강산의 한 면을 보았는데도 산의 신령스러움을 또한 경험할 수 있었다. 조금 쉬고 말에게 꼴을 먹이고는 재촉을 해서 출발하였다. 멀리 보니 한 관인이 화천 길을 따라 가고 있었다. 알아보니 회양 군수가 나에게 안부를 묻고자 직로를 따라 신안부에 이른 자였다. 급히 돌아가므로 거리가 멀어 부를 수가 없었다.
장안동 장안사에서의 해프닝
철리현을 넘어, 하나의 큰 평야을 지나니 이 곳은 장안동이다. 물은 더욱 맑고 돌은 더욱 희었으며 산은 더욱 기이하니 인간세상이 아니었다. 골짜기가 있으니 바로 만폭동의 하류요 구섭시달문이었다. 무쇠로 하여금 말 위에서 피리를 불며 앞으로 가게 하니 노승이 우리를 맞이하여 산당으로 안내하였다. 어디서 왔냐고 묻길래 나는 거짓으로
“우리들은 서생으로 경성에서 왔습니다.”
하고 다른 손님이 있는지를 물었다. 승려는
“며칠 전에 한 객이 왔다 갔습니다. 최근 소문을 들으니 예조판서께서 함흥부에 봉심차 갔다가 장차 외산으로부터 이 곳으로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각 읍에서 각기 예물을 갖추어 기다리고 있은 지 여러 날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경성으로 바로 떠나셨다고도 하나 자세히는 모릅니다.”
라고 하였다.
나와 이 좌랑은 스님의 말을 듣고 킥킥 웃었다. 술을 들어 갈증을 풀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 싸 가지고 온 식량을 찾아 밥을 먹었다. 여러 승려들이 역졸들에게 물어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고는 쌍수로 미안해하면서
“노승이 망령이 나서 어른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상공은 어느 골짜기로부터 오셨습니까?”
내가 그 물은 연고를 물으니 여러 승려들이 이르기를
“여기서부터 회양까지는 이틀이 걸리는 거리인데 하루 만에 이르렀으니 너무나 신기합니다.”
하였다. 이야기하는 사이에, 동자승이 윗절에 손님이 왔다고 보고하였다. 누구냐고 물으니 도사와 은계 찰방이다. 윗절은 바로 표훈사이다. 여기에서 5리쯤 된다. 내가 즉시 동자승에게 내가 왔다고 달려가서 보고하라고 하였다. 때는 밤으로, 이미 일 경이 지난 시각이었다. 도사 尹趌(윤길)과 찰방 李汝機, 집경전 참봉 盧勝이 나를 흡곡현에서 기다리다가 내가 바로 서울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자기들끼리 금강산 유람을 하는 중이었다. 동자승의 보고를 듣고 한편으로 놀라고 한편으로 의심하면서 넘어질 듯 달려 내려왔다. 나를 맞이하여 절하며 말하기를,
“상공께서는 하늘에서 내려오셨습니까?”
하고는 이어서 산중에서 양식을 어떻게 조달했는지 물었다. 나는 가지고 온 반찬그릇을 내놓고 술을 마시며 말하였다. 그러자 두 사람은
“좋긴 좋지만, 여러 고을에서 상공을 위하여 가져온 것을 아직 철수하여 되돌리지 않았습니다. 어찌 차고 담박한 것으로 고생을 하십니까? 없다면 몰라도 여러 군에서 각각 술잔을 올렸습니다.”
하였다. 술잔을 주고받으며 권하느라 밤이 깊어서야 흩어졌다. 이지러진 달은 이미 동쪽으로 떠올랐다. 반쯤 취하여 섬돌에 걸어 나가니 가을 밤은 적막하고 골짜기의 하늘 빛은 밝고 청량하다. 여러 봉우리가 옥처럼 서 있는 것을 올려다보니 어두운 가운데 위압감을 준다.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은 觀音峰이고 그 다음이 地藏峰, 다음이 普賢峰이다.
밤에 동쪽 요사채에서 잤다. 중 曇裕는 나이가 80을 넘었는데도 두 눈동자가 빛나고 눈썹은 희고 길었다. 절의 고사를 잘 알고 있었다.
시왕백천동의 끝없는 골짜기
다음 날 아침 하늘이 밝자 내가 먼저 일어나 옷을 입고 절집 뒤의 조그만 언덕에 걸어 올라갔다. 사방의 산 빛이 옥처럼 눈부셨다. 처음에는 밤새 쌓인 눈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바위였다. 재촉하여 밥을 먹고 가벼운 차림으로 동자승이 앞서 길을 잡고 나는 가마를 타고 따라갔다. 큰 내를 건너서 시왕백천동[十王百川洞]으로 들어갔다. 괴이한 돌들이 길에 흩어져 있고 날카로운 대나무로 덮여 있다. 좌우에는 삼나무․소나무의 푸르름이 사람을 기습하고 못은 맑고 넓다. 못의 동쪽에 옛 성이 있고 성의 북쪽에는 큰 봉우리가 있어 허공을 높이 찔러서 우러러볼 수가 없다. 바로 어제 밤에 말한 지장봉이다. 골짜기 길을 에돌면서 봉우리들이 뾰죽하게 서 있는데, 마치 칼과 창이 서로 마주하는 것 같았다. 한 봉우리를 지나면 한 골짜기가 나오고 골짜기가 다하면 또 골짜기이다. 골마다 시냇물이 있고 물마다 모두 폭포가 있고 못이 있다. 모두 특수한 형상과 기이한 모습이다.
만폭동과 신선의 피리소리
彌陀庵에서 조금 쉬었다가 드디어 鳴淵으로 내려갔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고 격류가 내리 쏟아졌다. 마치 항아리에서 소리치는 것 같다. 맑은 하늘에 눈을 뿜어내는 것 같고 흰 해가 천둥을 다투는 것 같다. 그윽하게 신비하고 괴이하며 황홀하여 내려다볼 수가 없다. 이 길에서부터는 모두 아슬한 바위이고 바위가 끊어지면 나무다리로 이었다. 우리는 모두 가마를 버리고 지팡이를 짚고 절벽을 따라서 시내를 건너 철쭉을 헤치며 나아갔다. 큰 시내가 다투어 흐르고 격하게 흘러내려 폭포가 되고 물이 머물러 못이 된다. 발담․화룡담․흑룡담․벽하담․응벽담이 특별한 것이고, 조그만 것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으니 이래서 만폭동이다. 골짜기에 입이 딱 벌어질 정도로 큰 암석이 하나 있다. 피로가 심하여 그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아전이 술과 안주를 내놓아 둘러앉아 마셨다. 바위에는 봉래 양사언이 쓴 “봉래풍악 원화동천” 여덟 글자가 있는데, 글자의 크기가 사슴 정강이 만하다. 왼쪽에는 금강대가 있고 대 위의 돌 틈에 학 둥지가 있다. 둥지는 비고 학은 없다. 중이 말하기를,
“때때로 울며 날아가는데, 둥글게 돌아 날아가고 몸통은 푸르고 머리는 붉습니다.”
라고 하였다.
술을 마시며 내가 함무쇠에게 몰래 향로봉 제일 높은 봉우리 소나무 우거진 곳에 올라가 한 곡을 연주하게 하였다. 그 소리가 묘연히 구천 하늘에서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앉아 있는 객들이 놀란 눈으로 귀를 기울여 듣고는
“상공께서도 들었습니까?”
하기에, 내가 짐짓 못 들은 체하니 좌우가 조용해지면서,
“이상하다. 하늘의 음악이다. 사람들이 이 봉우리에 신선이 있다더니 정말 헛소문이 아니로고.”
하였다.
소리는 더욱 맑고 고우며 구름과 무지개 속으로 흩어져 들어갔다. 바람으로 인하여 때때로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니 내가 비록 알고는 있었어도 역시 의심할 여지없이 신선의 소리였다. 여러 사람들이 오래 있다가 비로소 알고는 서로 박수를 치니 또한 좋은 광경이었다. 흥이 다하고 술도 다하고 해도 황혼녘이 되었다. 시내를 따라 걸어 내려와 저녁에 표훈사에 투숙하였다.
표훈사의 흥망
절 문 안에는 비석이 있는데, 1338년(後至元4)에 건립되었고, 梁載가 비문을 짓고 權漢功(?-1349, 호는 一齋)이 글씨를 썼다. 그 記文은 원나라 英宗이 지은 것으로 절에 돈과 명주를 시주하고 여러 승려에게 반승을 베푼 사실을 적은 비[萬人緣捨施碑]이다. 대개 원나라는 불교를 숭상하여 칙사를 보내어 향을 내리고 불전을 건립하여 여러 봉우리에 가득 찼다고 한다. 이 절이 가장 컸는데, 임진년에 불타서 여러 승려들이 중건하였다. 아직 단청은 칠하지 않았다. 밤에 여러 사람들과 술자리를 벌이고 즐겼다.
정양사에서 본 주변 경치
다음 날 일찍 일어나 바로 正陽寺에 올랐다. 절은 봉우리 정상에 있고 길은 매우 험준하였다. 혹 가마를 타기도 하고 혹 지팡이를 짚기도 하며 물고기를 꿰어 엮은 듯이 걸어갔다. 절의 서쪽에 眞歇臺가 있는데, 푸른 회나무 수백 그루가 좌우에 끼고 서 있다. 바람이 일어나 상쾌한 기운이 뼈까지 스민다. 오래 대 위에 앉아 몇 잔 술로 장을 적신다. 절에 들어가니 절은 폐사가 되어 중이 없는데, 누대는 매우 맑고 절경이다. 깨끗이 청소하고 자리를 깔아 난간에 기대어 바라보니, 지나온 여러 봉우리가 모두 책상 밑에 있는 것 같다. 늙은 중이
“이 산과 바다는 구름과 안개가 많아 비바람과 무지개가 항상 몽롱하니 개이지를 않습니다. 놀러온 사람들이 10여 일을 머물러도 산의 한 면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데, 지금은 비가 조금밖에 오지 않고 새로 맑게 개었으니 산 빛이 마치 거울 면을 닦아 놓은 것 같아 1만2천 봉이 한 점 티끌도 없이 기이한 모습을 드러내고 아름다움을 다투는 것 같으니 빼어난 색깔은 반찬이요 단풍잎은 붉은 술입니다. 옅지도 짙지도 않고 마치 새로 물들인 것 같으니 이는 모두 수십 년 동안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상공께서는 정말 청복이 있으십니다.”
고 하였다. 내 옆에 앉아서 일일이 가리키며
“저쪽 동북쪽에 웅대하게 서려 주존이 된 것이 비로봉이고, 홀연히 솟아 있는 것이 혈망봉입니다. 두 개가 날카롭게 허공을 찌르고 있는 것은 향로봉이고, 기이한 암석이 융기하여 큰 신령한 것을 쪼갠 것 같은 것이 금강대입니다. 여러 신령스런 것들에 둘러싸여 기를 품고 흘리지 않는 것이 중향성이고 기타 나는 봉황 같고, 치솟는 용 같고, 웅크린 호랑이 같고, 싸우는 고래 같고, 달리는 듯하고 도약하는 듯하고 조회하는 것 같고 읍하는 것 같은 것이 영랑재[永郞岾], 水晶峰, 獅子峰, 迦葉峰, 船岩峰, 白雲峰, 萬灰峰, 圓寂峰, 望高峰, 石鷹峰, 僧床峰, 日出峰, 月出峰, 摩訶衍峰입니다. 이는 봉우리 중에 빼어난 것이고 그 나머지는 이름이 좋지 않거나 혹 이름이 정해지지 않았어도 또한 각각 기이하고 준험하게 각각 그 자태를 다하니 암석은 희고 단풍은 붉으며 소나무․회나무는 푸르러 똑같이 생생한 그림입니다.”
廬山眞面目이 모두 여기에 있으니 눈을 빼앗고 정신을 얼게 하여 해가 기우는 줄을 모르겠다.
적막한 개심암
드디어 북쪽으로 산등성이에 올라가 開心庵에 도착하였다. 암자의 지세는 정양사에 비해서 더욱 험준하고 의취가 자못 그윽하고 고요하였다. 천덕․원통을 거쳐 마하연에 도착하니 맑고 빼어난 것이 산중에서 제일이다. 중향봉이 위호하듯이 둘러 있어 境界가 엄숙하고 삼연히 기백이 움직일 듯하다. 좌우에는 적목, 오가피, 노삼, 장회, 측백, 해송이 많이 자라고 잡목은 없다. 새 한 마리도 울지 않고 날짐승, 길짐승이 모두 끊어졌다. 스님이
“중향성에서 이 암자까지는 벌레나 뱀, 도마뱀 같은 것이 절대 없습니다.”
고 말하였다. 스님이 곡기를 끊고 정백하여 깨끗하였다.
문 밖에는 나무가 있는데, 잎이 해송 같고 껍질은 계수나무 같았다. 사람들이 계수나무라고 하였는데, 껍질을 벗겨 맛을 보니 조금 쓰고 달고 맵지 않았다. 계수나무는 아니지만 좋은 나무이다.
해가 아직 일러 여러 사람들이 불지암, 묘길상에 올라가려고 하였는데, 이 곳에 도착하니 심신이 맑고 편안해져 차마 버리고 갈 수 없어 참선을 하여 입정한 의취가 있다. 뜰을 산보하니 암석 구멍에 샘물이 나와 냉랭하기가 반향이 있는 듯하다. 떠 마시니 달기가 감자장 같다. 스님과 함께 잤다. 밤이 깊어 멀리 여러 암자를 보니 절의 등불이 형형하여 마치 반딧불을 뿌려 놓은 것 같다. 처마에는 북두칠성이 가까이 있어 우러러 딸 수 있을 것 같았다.
보덕굴의 나무사다리
다음 날 아침 普德窟에 가려고 重香城을 걸어서 나왔다. 화룡담 상류로부터 산허리를 따라서 돌계단이 허공에 걸려 있고 돌계단이 끝나는 곳에는 나무사다리가 걸려 있다. 사다리는 무릇 40여 계단인데, 사다리가 다한 곳에 석대가 있다. 대의 왼쪽에는 암자가 두 칸쯤 있고 돌 위에 기둥을 만들고 두 구리기둥을 세웠는데, 높이가 백 길이나 된다. 기둥 위에 반 칸을 엮어서 안에는 관음소상을 안치하였다. 두 개의 쇠사슬을 써서 하나는 기둥에 박고 하나는 실내를 둘렀다. 모두 돌에 녹여서 단단하게 하였다. 암자가 반쯤 허공에 있어 바람이 불면 떨어질 듯하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위태로워서 오래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보덕대에 올라 술을 시켜 질탕하게 마시고 있는데, 갑자기 화룡담 위에 한 줄기 흰 구름이 화로 연기처럼 피어나더니 조금 위로 올라와서는 자리만하게 커졌다. 조금 있다가 여러 못과 골짜기에서 모두 구름 기운이 생기더니 마치 한 필의 비단을 걸친 듯 미친 듯이 내달아 서로 만나고 만나면 문득 여러 골짜기와 못에 모여들어 함께 백옥 같은 땅을 만든다. 돌아보니 요리사와 종들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아득하고 어두운 가운데 다만 말하는 소리만 들렸다. 지팡이 틈 만한 사이로 보이는 흰 해는 맑고 밝으며, 발 아래의 세계는 망망하게 혼돈하여 들여다볼 수가 없으니 역시 기이한 경치이다.
일일이 골짜기의 물과 암석을 찾아다니며 기이한 경치를 마음껏 구경하니 다리가 피곤하여 가마에 의지하여 내려왔다.
귀로
저녁에 표훈사에 들어왔다. 여러 사람들이 크게 술판을 벌이고 나를 작별하였다. 나는 너무 피곤하여 몇 잔만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8월 30일
행장을 꾸려 표훈사를 출발하였다. 장안사에서 골짜기 입구에 나오니, 盧勝은 강릉으로 돌아가고 도사와 찰방도 각각 임지로 돌아갔다. 시냇물 소리가 울부짖으며 작별의 안타까움을 더해 준다. 피리부는 무쇠를 꼭 앞에 대동시켰는데, 앉든가 쉬든가 피리부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낮에 단발령에 도착하니 감사 李光俊이 나를 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고개 서쪽에서 백여 리를 달려 고개 위에서 만났다. 친구간의 묵은 우정을 풀었다. 그의 아들 李民寏도 따라와서 가지고 온 술을 꺼냈다. 몇 잔을 돌리고 작별하였다. 저녁에는 통구현의 촌사에서 잤다. 서울로 향하였다.
김용곤외(역), 『조선시대 선비들의 금강산답사기』, 혜안, 1998. pp.195-214.(이정구/박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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