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자료

[스크랩] 28. 풍악행(윤휴)

회기로 2010. 1. 24. 19:57
        

28. 楓岳錄(尹鑴)


  임자년 윤 7월 24일(정유) 맑음.

  아침에 배와 대추 등 과일을 사당에다 차려놓고 풍악에 다녀오겠다는 뜻을 고하였다. 그리고 나서 출발하여 통제 외삼촌 댁에 도착하였다. 내가 가지고 가는 것이라곤 주역 두 권과 일기책 한 권 뿐이고, 그 나머지 일행들의 필요한 여행 도구는 모두 외삼촌이 챙기셨다. 부평 사는 외삼촌도 오셔서 나더러 멀리 가 너무 오래 있지 말라고 타일렀다. 통제 외삼촌과 함께 출발하여 동소문 밖에 나가 누원에서 말에 꼴을 먹이면서 지나가는 중 덕명이라는 자를 만났다. 그 중은 일찍이 풍악산 구경을 했던 자로서 우리에게 대충 풍악의 뛰어난 경치를 말해주었다. 늦게야 양주읍에 도착하여 외삼촌은 양주목사를 찾아가고 나는 민가에 부쳐 있었는데, 양주목사 이원정이 찾아와서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유군여거-이름은 광선임-가 따라왔다. 유군은 원래 모르는 사이였는데 외삼촌을 통해 와 좌중에서 서로 인사를 나눈 사이이다. 그 민가에 벼룩이 많아 잠자리를 고을 서당으로 옮겼는데 고을 주수의 아들인 정자 담명이 찾아왔고 주좌인 우와 한 두 사람도 왔다. 날씨가 매우 더웠다.


  25일(무술) 맑음.

  양주목사 부자가 또 왔다. 아침에 출발하여 무성 고개를 넘어 감악산을 바라보고 가면서 유군과 함께 홍복·고령·도봉·불암 등지를 가리키기도 했다. 입암 율정 아래서 말에 꼴을 먹인 후 일행과는 일단 갈라섰다. 나는 송형석우계신이 살던 곳을 묻고 송군욱의 초당에 들렀더니 매화나무 대나무는 옛 그대로이고 벽에는 내가 몇 해 전에 써 준 기문과 허장미수가 쓴 기가 걸려 있어 읽어보니 지난 날의 회포가 일어 눈물이 글썽했다. 송군제 부자를 다 조문하고 일행을 뒤쫓아 간파령 아래서 만났다. 차근연을 건너서는 유군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 가다가 저물어 신릉 정극가 산장에 당도하여서는 함께 잤는데, 자해에 홍주를 마시며 서로 흔쾌하게 보냈다.


  26일(기해) 맑음.

  정극가와 출발은 함께 했으나 길이 달랐다. 나는 진수동으로 이 참봉 언무 경윤을 찾아가서 그의 세 아들 태양·태징·태륭과 윤생세필을 만나 보았다. 윤생은 이 참봉의 이모 아들로 우리 남원 윤씨라고 하였다. 이생 태양이 나를 따라왔다. 군영동에 이르러 허미수 어른을 뵈었는데 일행들은 먼저 와 있었고, 미수 어른을 배알하는 자리에서 허생함·송생직·정생태악을 만났다. 미수 어른은 서실로 나가고 그들과 함께 은행나무 그늘 아래 앉아 있었는데 초가집에 온갖 화초가 그윽한 정취를 풍겼다. 미수 어른이 두류산·오대산·태백산 등의 기록과 정허암전·답자대부상서를 꺼내 보여 주기에 나는 일찍이 지은 신계설로 수답하였다.

  또 짐 꾸러미에서 술과 과일을 내놓아 몇 순배 대작한 후 섬돌 위에 있는 일월석을 구경하였다. 옛날에 석경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해와 달 그림자가 석면에 훤히 비쳤으며 미수 어른이 손수 그 세 글자를 조각했다고 한다. 얘기 도중 길을 떠나는 정표로 글을 지어달라고 청했더니 쾌히 허락하고 또 전서로 광풍제월 낙천안토 수명안분 이렇게 열두 자를 써 주어 유군과 나눴는데 유군은 수명 이하 네 글자를 차지했다. 늦어서야 하직하고 출발했는데 외삼촌과 유군은, 오늘은 산 속의 신선늙은이를 만나 봤으니 헛걸음은 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징파도를 건너 옥계역에서 잤는데 밤늦게까지 얘기를 나누었다.


  27일(경자) 맑음.

  아침을 먹고 출발하였다. 시냇가에서 말에 꼴을 먹이다가 길을 지나가고 있던 덕능이라는 산사람을 만났다. 풍악에 가면 서로 얘기할 만한 산인이 누구냐고 물었더니, 유점암에 있는 나백과 장안암 곁에 사는 취양이 있다고 대답했다. 식사를 끝내고 철원 고을을 가다가 용담 고개 위에 올랐더니 동북으로 산이 확 트여 몇백 리가 훤히 바라보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거기가 평강 지경이라고 하였다. 한낮에 철원 읍내에 들렀더니 주수 권공순창이 사람을 보내 안부를 묻고, 저녁에는 찾아와 간단한 술자리를 베풀어 주었느데 송이버섯·팥배·머루·다래 등 산중 별미를 두루 맛볼 수 있었다. 아침에 함께 북관정에 오르기로 약속하고, 얘기 도중 권공과는 권수부 얘기가 나와서 살아서 있고 죽어서 없고를 생각할 때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이어 앞길이 험난할 것이라는 쪽으로 말이 갔는데 이 때 권공 말이, 앞길이 비록 험난하다 하더라도 노장이 일을 맡으면 실패는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우리 외삼촌을 두고 한 말이었다. 그리하여 외삼촌 말씀이,

  “이번 길에는 내가 사양하지 않고 용사를 할 것이니 우리 일행 모두도 내가 통솔하면서 좌지우지할 것이네.”

하여, 서로 한바탕 웃었다.


  28일(신축) 맑음.

  아침에 주수가 와서 함께 북관정에 오르는데 펑퍼짐한 넓은 평야가 백 리 멀리 뻗쳐 있고, 서쪽에 우뚝 솟아 있는 것은 금학산인데 그것이 벋어 가서 보개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들 가운데 서너 개 옹기종기 언덕이 있는데 그것은 보개산이 벋어나온 종적이라고 하였다. 간단히 술 한 잔 나누고 작별했는데, 그 때 마침 시원한 바람이 잠시 스치고 지나가는데 높은 산 가파른 절벽 위에는 이미 가을빛이 역력하였다. 정자가 큰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어 동으로는 궁예의 유허가 보이고 서북으로는 보개산·숭암산 등을 바라볼 수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높은데 오르면 시상이 떠오른다는 생각을 갖게 하였으나 그 때는 시구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이 시는 그 뒤에 쓴 것이다.


  我夢蓬萊好(아몽봉래호)  내 봉래산 구경의 꿈을 안고

  行行登北觀(행행등북관)  가다가 북관정에 올라 보니

  萬山忽中闢(만산홀중벽)  중간에 산들이 확 트이고

  一水何縈灣(일수하영만)  감돌아 물이 흐르는 곳

  曠蕩弓王宅(광탕궁왕택)  저리 광활한 곳 궁예의 옛터인가

  穹隆寶蓋山(궁융보개산)  우뚝 솟아 있는 보개산이로세

  沃野千萬疇(옥야천만주)  비옥한 들판도 천만 주나 되어

  天府猶函關(천부유함관)  함곡관 같은 천연의 요새로세

  雄豪亦一時(웅호역일시)  영웅 호걸도 각기 한때인지라

  故墟惟頹垣(고허유퇴원)  옛터엔 쓰러진 담만 남아 있네

  興亡機飜覆(흥망기번복)  흥망이 몇 번이나 되풀이되었을까

  治忽迭相看(치홀질상간)  국가 치란도 마찬가지라네

  我來屬流火(아래속류화)  내가 왔을 때는 칠월이라서

  鴻雁翔雲間(홍안상운간)  구름 사이론 기러기떼 날고

  涼風起林木(양풍기림목)  숲속에는 시원한 바람 일어

  秋氣屯高原(추기둔고원)  고원에는 벌써 가을 기운인데

  存沒感舊懷(존몰감구회)  삶과 죽음에 옛 감회가 깊고

  主人情惓懃(주인정권근)  주인의 정은 끈끈도 하네

  離亭一樽酒(이정일준주)  이별의 자리에 한 독 술이언만

  前路嗟漫漫(전로차만만)  앞길은 얼마나 멀고 멀까

  老將不失律(노장불실률)  노장이 기율을 잃지 않아도

  別語生濤灡(별어생도란)  작별 앞두고 말에 파도가 이네

  三盃上馬去(삼배상마거)  석 잔 술로 말에 올라 떠나니

  征袂風翩翩(정몌풍편편)  바람에 옷소매가 펄럭이네


  경재소에서 말에 꼴을 먹이고 황감사 정사에서 밥을 먹고 숨을 돌리는데, 푸르른 절벽 사이로 한 줄기 시내가 흐르고 있어 계산의 정취가 물씬하였다. 우리를 맞으러 소년이 왔기에 성명을 물었더니 황응운으로 고 감사 경중의 현손이며 수재 석의 아들이라고 한다. 자기 선대의 유첩을 꺼내 보이는데 거기에 우리 선인이 황감사를 전송하면서 읊으신 시 두 수가 적혀 있어 받들어 읽고는 슬픈 감회를 느꼈다. 황수재를 시켜 그 시를 등사해 오게 하고 드디어 금화를 향해 출발하여 오다가 시냇가에서 쉬고는 금화 고을을 지나는데 앞길에서 바라보니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앞에 비각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 바로 홍감사가 순의한 곳이라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읽어 보니, 평안도 순찰사 홍명구 충렬비라고 씌어 있었다.

  내가 몇 해 전에 이를 두고 쓴 시가 있기에 유군에게 외워 보였는데 시제는 애부여로, 부여는 금화현의 별호이다. 시는 이렇다.


  和議之後事大謬(화의지후사대류)  화의가 성립된 후 일이 크게 잘못 되어

  十濟孤城危一髮(십제고성위일발)  외로운 십제성이 위기일발 이었다네

  南師雲屯鼓不揚(남사운둔고불량)  구름 같은 남쪽 군대 북도 한 번 못 울리고

  北師鳥竄旗先奪(북사조찬기선탈)  북군들은 도망가고 숨기에 정신없어

  我公投袂涕淚起(아공투몌체루기)  우리 공이 소매 털고 눈물로 일어났다가

  嗚呼力屈中道死(오호력굴중도사)  애석하게 힘이 다해 중도에 죽었다네

  平生一死許報國(평생일사허보국)  일사보국 그 마음을 한평생 다졌기에

  橫屍軍前非所惴(횡시군전비소췌)  싸움터에서 시체되는 것 두려울 바 아니지만

  恨不用劒斬驕卒(한불용검참교졸)  단칼에 교졸의 목 베버리지 않았다가

  倉卒失計天下事(창졸실계천하사)  천하사를 그르친 것 그것이 한이라네

  洪監司柳兵使(홍감사유병사)    홍감사·유병사는

  胡不提兵走遼碣(호불제병주요갈)  어찌하여 적군의 본거지로 쳐들어가

  一擧可以旋天地(일거가이선천지)  단숨에 천지를 바꿔놓지 않았던가

  天不佑我書生拙(천불우아서생졸)  하늘이 우릴 돕지 않고 서생은 옹졸해서

  脫兜被髮鞍底活(탈두피발안저활)  투구 벗어 투항하고 안장 밑에서 살아남은 자도 있고

  披紫肘金牖下沒(피자주금유하몰)  고관 차림으로 들창 아래서 죽어간 자도 있었는데

  君不見松山半夜事蒼黃(군불견송산반야사창황)  그대 송산에서 밤중에 일어난 창황한 일 보지 않았던가

  十萬官軍隨火滅(십만관군수화멸)  십만 명 관군이 일시에 멸망하고 말았네


  역리의 집에서 잤는데 그의 성명을 물었더니 진우운이라고 했다. 이날 극가가 얘기 도중 정군평의 시 세 수를 외웠는데 좋았다. 나도 구경 나와서 옛 것을 찾고 싶은 감회가 있었기 때문에 그 시를 여기에다 적어 보았다.


  有聖生殊域(유성생수역)  이 나라에도 성인이 나셨는데

  于時並放勳(우시병방훈)  때는 방훈과 동시대였다네

  扶桑賓白日(부상빈백일)  동천에 돋는 해 맞이하고

  檀木上靑雲(단목상청운) 박달나무는 청운을 꿰뚫는 듯

  天地侯初建(천지후초건)  이땅에 제후를 처음으로 세워 놓았으나

  山河氣未分(산하기미분)  산하는 아직 혼돈상태였다네

  戊辰千歲壽(무진천세수)  무진년부터 천 년을 사셨으니

  吾欲祝吾君(오욕축오군)  우리 임금 위해 축수하고 싶네

               -이상은 단군이다.-


  亳社歸玄鳥(박사귀현조)  상나라 서울에 제비는 돌아가고

  河舟見白魚(하주견백어)  황하 배안에 백어가 나타나자

  還將八條敎(환장팔조교)  여덟 가지 법 조목 챙겨 가지고

  來作九夷居(내작구이거)  동쪽의 나라에 와 살았는데

  海外無周粟(해외무주속)  해외라서 주의 영향 받지 않고

  天中有洛書(천중유락서)  낙서 전수는 하늘의 뜻이었네

  故宮今已沒(고궁금이몰)  지금은 몰락해 버린 옛 터에

  禾黍似殷墟(화서사은허)  은허인 양 벼와 기장만 우거져 있네

              -이상은 기자이다.-


  王儉都雄壯(왕검도웅장)  웅장한 왕검성 도읍지에

  天孫事寂寥(천손사적요)  천손의 일 까마득하기만 하네

  白雲空見馬(백운공견마)  흰구름 속에 말만 보이지

  蒼海不聞橋(창해불문교)  바다에 다리 소식 들을 길 없어

  怳惚神仙化(황홀신선화)  황홀하게도 신선이 되었으리니

  凄凉世代遙(처량세대요)  처량한 세대 멀기만 하여라.

  獨留文武井(독류문무정)  그래도 문무정이 남아 있어

  猶得認前朝(유득인전조)  전조의 것임을 알 수 있다네

              -이상은 동명왕이다.-


  29일(임인) 맑음.

  역리들이 술과 과일을 가져와 대접하였다. 아침에 출발하여 직목열기에서 말에게 꼴을 주고 외삼촌을 대신해서 회양군수에게 편지를 써 역졸을 주면서 전하라고 했다. 중치를 지나니 금화와 금성의 분계점이라는 돈대가 있었는데, 거기서부터 서쪽으로는 지세가 구불구불하면서 동쪽으로 높아지고, 동쪽으로는 지세가 점점 낮아져서 물이 모두 동으로 흐르고 있었다. 재를 넘어 10여 리를 더 가 큰 시냇가에 이르자 사람들 수십 명이 모여 물건을 교역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금성 장터이고 시내 이름은 남대천이라고 했다. 시내를 끼고는 느릅나무·버드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었고 짙어가는 가을빛 속에 나무 사이사이로 인가가 은은히 보였으며 마을은 널찍하고 확 트인 데다 전답들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마들도 오고가고 하였다.

  말에서 내려 다리 가에서 쉬고 있노라니 옷차림이 남루하고 얼굴도 깡마른 늙은 아전 하나가 앞에 와서 절을 하였다. 성명을 물었더니 지응룡이라고 하는데 함께 얘기해 보니 문자도 꽤 알고 또 말하는 것이 조리가 있었다. 그래서 글을 얼마나 읽었느냐고 물었더니, 소년 시절 사서와 이경을 읽고 이백·두보·한유 등 여러 문장가의 시를 일만여 수나 외웠으나, 과거에는 응했다가 합격을 못했다고 하였다. 그래서 지은 시가 있으면 외워보라고 했더니 그는,


  白露西風八月秋(백로서풍팔월추)  하얀 이슬 갈바람 계절은 가을인데

  蘆花如雪滿江洲(노화여설만강주)  눈 같은 갈대꽃이 강주에 가득하네

  從知志士常多感(종지지사상다감)  지사라면 누구나 감개가 많을 때인 것을

  不獨當年宋玉愁(부독당년송옥수)  어찌하여 그 때에 송옥만이 슬펐으랴


했고, 또 금강산에 가 놀면서 지은 것이라고 외우는데,


  玲瓏金刹白雲邊(영롱금찰백운변)  흰구름 가에 있는 영롱한 사찰 하나

  踏閣攀林一徑穿(답각반림일경천)  누각 밑 숲 사이로 오솔길 하나 났네

  龍出洞門常作雨(용출동문상작우)  동문에는 용이 나와 언제나 비 뿌리고

  鶴巢松樹不知年(학소송수부지년)  소나무에 학의 둥지 몇 해 됐는지 모른다네

  僧從殿上鳴鍾飯(승종전상명종반)  전상에 중은 서서 밥때라고 종 울리고

  客至山中借榻眠(객지산중차탑면)  산중에 온 나그네는 자리 빌려 졸고 있네

  怪底夜來難得夢(괴저야래난득몽)  밤들어도 이상하게 꿈 이루지 못하는 것은

  秋風窓外繞鳴泉(추풍창외요명천)  들창 밖 우는 샘을 갈바람이 맴돌아서라네


하였다. 그의 세계를 물었더니 고려 말기 지윤의 후예라고 하였다. 지윤이 베임을 당하자 그 자손들은 아전으로 전락되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지윤이 문리였기에 그 기류가 서로 유전된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은 비록 늙고 쓸쓸해 보였지만 그 시는 읊을 만했으니 그 골몰한 꼴이 가련했다. 시내를 따라 내려오다가 금성 읍내에 있는 역리 김서립의 집에서 잤다. 외삼촌이 주수에게 보낸 쪽지는 문지기에게 거절을 당하였다.


  8월 1일(계묘)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창도역에서 말에 꼴을 먹였다. 역관의 벽 위에 시 두 수가 걸려 있었는데 하나는 민이상제인이 가정 기해년에 읊은 것을 그의 원손인 민정중대수가 각자하여 달아 놓은 것이고, 다른 하나는 경술년에 어느 과객이 쓴 것으로 그의 성명은 씌어 있지 않으나 다 읊을 만했다. 민제인의 시는,


  寵恩榮養孰如之(총은영양숙여지)  사랑하고 먹여 주고 누가 그와 같으리요

  回首終南尙戀思(회수종남상련사)  종남산 돌아보니 그리운 님 생각나네

  北塞寒雲歸去遠(북새한운귀거원)  북쪽 변방엔 찬 구름 멀리멀리 가 버렸고

  東門落日出來遲(동문낙일출래지)  동문엔 어제 진 해 언제 다시 뜬다던가

  花殘野菊秋將老(화잔야국추장로)  들국화도 다 지도록 가을은 깊어가고

  山遶郵亭路自岐(산요우정로자기)  우정을 산이 두러 두 갈래로 길이 났네

  杖鉞渡江聊擊楫(장월도강료격즙)  도끼 짚고 강을 건너 노를 쳐부숴야지

  一生安肯負心期(일생안긍부심기)  한평생 먹은 마음 저버릴 수 있다던가


하였고, 과객의 시는 이렇다.


  艱難險阻備嘗之(간난험조비상지)  험난하고 어려운 일 맛볼 만큼 보았건만

  客館無人慰所思(객관무인위소사)  객관에 찾아드니 위로해 줄 사람 없네

  落日孤雲東去遠(낙일고운동거원)  지는 해에 외로운 구름 동으로 멀리 가고

  秋風五馬北歸遲(추풍오마북귀지)  갈바람에 북으로 가는 수령 행차 더디어라

  寧同杜子瞻家室(녕동두자첨가실)  차라리 두보처럼 집 생각을 할지언정

  不學楊公泣路岐(불학양공읍로기)  양주 같이 기로에서 울고 있진 않으려네

  身被國恩何以報(신피국은하이보)  나라 은혜 입은 이 몸 무엇으로 보답하리

  承流盡責是心期(승류진책시심기)  교화 책임 다해볼까 마음 기약했었는데


  나도 길을 가면서 다음과 같이 절구 한 수를 읊어 두 군들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世事如絲不可理(세사여사불가리)  헝클어진 세상사 가닥이 안 풀리어

  秋風欲上望高峰(추풍욕상망고봉)  갈바람에 높은 산에나 올라볼까 생각이라네

  倘從魯叟浮滄海(당종노수부창해)  공자님 뒤를 따라 바다에서 떼를 탈까

  更擬飆輪喚赤松(갱의표륜환적송)  신선이 되어가서 적송자를 불러볼까


  이에 두 군이 다 화답을 하였다. 저녁이 되기 전에 하지성 민가에서 묵기로 했는데, 집주인 성명은 이천봉이었다. 그날 길가에서 풀 꽃 등을 꺾어 여러 일행들과 함께 그 꽃과 풀의 성미를 분석해보고, 혹은 마부에게 물어 보기도 하였다. 그 중에는 쑥 종류가 제일 많았고 또 이름이 있는 것들도 일곱 종류나 되는데, 그 지방 이름으로는 백양쑥·물쑥·참쑥·사자발쑥·다복쑥·제비쑥·벌쑥이었다. 혹자의 말로는, 백양쑥은 떨기로 나는 쑥으로 바로 옛날에 시초라고 한 것이고 중국 사람이 만든 본초와는 맞지 않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는, 가을이 되어 자색꽃이 피는 것이 그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아마 산국화 종류가 아닌가 싶었다. 이어 여러 사람들 말이, 천하에 쓸모 없는 물건은 없다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물론이다. 타고난 재목 그대로만 이용한다면 천하에 버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으로서 착하지 못한 자도 역시 써먹을 곳이 있을까?”

했더니, 모두 하는 말이,

  “천하에 제일 못쓸 것이 착하지 못한 사람인데 그것을 어디에다 써먹을 것인가.”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천하에 제일 쓸모 없는 것은 중간치인 것이다. 냉하지도 않고 화끈하지도 않고 아무 하는 일 없이 세월만 보내면서 취할 만한 좋은 점도 없고 그렇다고 꼬집어 말할 만한 악도 없는 그런 사람 말이다. 차라리 아주 불선한 사람은 그런 대로 써먹을 곳이 있는 것이다.”

했더니, 모두 이상하다는 듯이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걸과 주가 지극히 불신했기에 탕과 무왕이 그들을 정벌하자, 하늘이 도와주고 백성들이 돌아오고 하여 천하를 통일해서 자손만대에 전하였고, 항적과 왕망은 나쁜 중에도 더 나빠 한고조와 광무제가 각각 그들을 죽임으로써 천하를 진동시켰고 그 여풍이 백세를 두고 영향을 주어 한나라 4백 년 사직이 유지될 수 있었으니, 그게 쓸모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뿐 아니라 전쟁과 병사 통솔에 있어서도 역시 마찬가지이니 한 사람을 죽였는데 삼군이 떨고 적국이 항복해 오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옛날 영웅이나 패주들이 사업을 경륜하면서 천하를 차지하는데 밑천이 될 수 있는 그러한 사람을 얻지 못할까 염려했던 것이며 나도 그래서 쓸모가 있다고 한 것이다.”

했더니, 모두들 하는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그래도 일리는 있어 사람 마음을 유쾌하게 해 주었다.”

하고서, 서로 한바탕 크게 웃었다.

  또 길에서 행인 한 사람을 만났는데 자기 말이, 산삼을 캐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 동행했으면 좋겠습니다. 데리고 가다가 삼지구엽초와 같은 영약이라도 캐면 그 역시 좋은 길동무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외삼촌 말씀이,

  “보아하니 그 사람 용렬해서 아무런 쓸모가 없겠다.”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용렬한 사람이기 때문에 쓸 만하다고 한 것이지요. 그가 만약 준수하고 영리하다면 우리에게 쓰여질 사람이 아니겠지요. 옛날 허노재 말이, ‘말은 상등 말을 타고, 소는 중등 소를 부리고,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 말은 준마라야 탈 만하고 소는 유순해야 다룰 수 있고 사람은 못나야 부려먹기가 쉬운 것이다. 만약 그가 지혜 있고 약은 사람이면 나에게 쓰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내가 그의 이용물이 되는 것이다.’ 했었고, 또 사마군실에게는 종이 하나 있었는데, 와서 일한 지가 오래 되어 사마공의 지위가 비록 참정에까지 이르렀지만 그때까지도 군실수재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소자첨이 왔는데, 그 종은 그때도 똑같이 그리 말하였으므로, 자첨이 그에게 타이르기를, ‘상공이 지금 이미 참정이 되었으니 대참상공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하여 그 종이 그 후부터서는 자첨이 가르쳐 준 그대로 부르자 공이 깜짝 놀라, ‘누가 너더러 말을 그렇게 하라고 하더냐?’ 하자, ‘지난번 소학사가 그리 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였다. 공이 탄식하며 하는 말이, 좋은 종을 자첨이 버려 놓았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게 모두 사람은 하등 사람을 써야 한다는 증험이 아니겠습니까.”

하고, 또 한번 서로 웃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이 두 이야기가 모두 폐단이 없지는 않다. 왜냐하면 나쁜 사람을 쓸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그를 측은히 여기고 도와 주려고 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고, 용렬한 자를 부릴 만하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자기 개인만 알고 이기심이 강하여 남을 깊이 이해하는데 도움을 못 주는 사람인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패자나 하는 짓이지 인인군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을 몰라서는 안 될 일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사리를 아는 자와 할 말이지 간웅에게는 할 말도 아닌 것이다. 말을 하고 나니 이런 생각이 다시 드는 것이다.


  2일(갑진) 맑음.

  아침에 출발하여 야음불천을 건너고 또 관음천을 거쳐 보리진을 건너고 통구원을 지나 길가 민가에서 말에 꼴을 먹였는데, 주인 성명은 전기천으로 우리에게 벌꿀과 과일을 대접하고 서울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드디어 단발령을 오르는데 산 이름은 갈리치이고 샛길이 험준하여 말을 타기도 하고 걷기도 하여 영상에 올랐더니 회정이 있었다. 섬돌에 앉아 쉬면서 풍악산을 바라보았더니 풍악의 여러 모습이 모두 눈 앞에 역력히 전개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절구 한 수를 지어서,


  東出都門八日行(동출도문팔일행)  도성문을 동으로 나와 여드레를 소비하며

  金城踏盡是淮陽(금성답진시회양)  금성을 지나치니 여기가 회양일레

  摩尼嶺上披雲坐(마니령상피운좌)  마니령 마루에서 구름 헤치고 앉아 보니

  萬二千峰次第迎(만이천봉차제영)  일만이천 봉우리가 차례로 맞아 주네


라고 읊고, 유군으로 하여금 화답하도록 하였다. 이 날은 신원에서 잤는데 집주인의 성명은 김세익이었고 서울에 오면 찾으라고 약속하였다.


  3일(을사) 맑음.

  신원의 물을 건너고 철이현을 넘어 만폭동 입구에 와서는 마부들을 시켜 시냇가에서 묵석을 주어오게 하였다. 시내를 가로질러 이리저리 건넌 다음 길가 소나무 숲 아래서 휴식을 취하고는 한 동구에 이르니 소나무 노송나무가 줄을 이룬 사이로 해송도 드문드문 끼어 있어 산이 비로소 기특하게 보였고 수석도 더 맑아 보여 동천의 정취가 물씬 풍겼다. 우천도라는 시내를 건너 말에서 내려 걷다가 시냇물에 발을 씻고 송단사에서 조금 쉬고 있노라니 승려 대여섯 명이 나와 맞아 주었다. 그들과 함께 절로 들어갔더니 문간에 우뚝한 누각 하나가 구름 닿게 지어져 있는데 앞에 마주 보이는 장경봉은 천 길이나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그 곁에 줄지어 있는 몇 봉우리도 모두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으면서 기괴웅장하여 이미 인간에서 보던 바가 아니었다. 절 이름은 장안사인데 그 절에 사는 중에게 물었더니, 원나라 순제의 비 기씨의 원찰로서 마룻대 들보 등 목재가 굉장하고 단청이 휘황찬란하기가 이 산 속에서 으뜸이라고 하였다. 그 날은 절 문간 앞에서 산책하고 거닐었는데 수석이 너무 아름다웠다. 말라 죽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중의 말로는 계수나무라고 했다. 노송나무 몸통에 잣나무 껍질이었는데 가지와 잎이 다 떨어지고 없었다. 뒤따르던 승려 몇 사람이 젊은 중을 시켜 절간 앞에서 해송자를 따라 오라고 하더니 거기에다 꿀을 타서 새참으로 내왔는데 역시 산중의 별미였고 또 석지를 아침 저녁 상에 올렸는데 그 산에서 나는 것이라고 하였다.


  4일(병오) 맑음.

  장안사를 출발하여 정양사로 가려는데 그 곳 승려가 남여를 준비해 놓고 대기하고 있었다. 바위골짜기의 맑은 물, 살짝 물들여진 단풍잎을 걸음마다 앉아서 구경할 만하였다. 걷기도 하다가 남여로 타다가 했지만 다리가 건너질러진 길이나 돌무더기 비탈길은 사람이 나란히 갈 수가 없었다. 명연에 이르러 조금 쉬었는데 물이 몇 길이나 깊어 보였지만 맑아서 바닥이 훤히 보이고 곤이 같은 잔 물고기들이 그 속에서 노닐고 있었는데, 승려 말에 의하면 여기가 만폭동 입구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못 속에는 그래도 잔 물고기가 있지만 여기서부터 그 이상은 물고기가 올라갈 수가 없다고 했다.

  한 곳에 다다르니 두 바위가 우뚝 솟아 완연히 문을 이루고 있고 절벽 전면에는 세 불상이 새겨져 있었는데 나옹이 남긴 작품이라고 하였다. 그 앞에는 백화암이라고 하는 고색창연한 사찰이 있었으나 사는 중은 없고 부도 다섯 종류와 비 네 개가 서 있었다. 부도는 청허 휴정, 제월 경헌, 취진 의영, 편양 언기, 허백 명조, 풍담 의심의 것으로, 경헌·의영·언기는 다 서산대사 청허의 제자이고, 명조·동산은 송월 응상의 제자이며, 의심은 편양의 제자라고 하였다. 그리고 비는 월사 의정·백주 천장·이단상 유능·백헌 의정이 지은 것이고 쓰기는 의창군 이광·동양위 신익성·판서 오준·낭선군 이오가 쓴 것으로, 큰 비에 훌륭한 각자가 산문을 훤히 비치고 있었다. 조금 머물면서 그것을 다 읽고 나서 또 표훈사로 갔는데 역시 규모가 큰 절이었다. 불당은 남쪽을 향하였고 부처는 동쪽을 향하고 있었는데 이 절 승려 말에 의하면 이 곳 지형이 가는 배 형국이어서 부처가 앉아서 키를 잡고 있는 것처럼 앉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재앙이 있다는 것이다. 옛날에 부처가 남향을 하고 앉았다가 만력 을사년에 홍수로 절이 무너졌었기 때문에 지금 다시 옛 모양대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 말이 궤변은 궤변이지만 역시 풍수가의 설이 아니겠는가.

  조금 쉬었다가 정양사를 향해 가는데 산길이 더욱 가팔라서 걷다 쉬고 걷가 쉬고 해야 했다. 장안사에서 표훈사까지 오는 동안 남여를 버리고 걷기를 여러 번 하면서 회암의 ‘남악운’에 차운을 해 보았다.


  爲憫人疲舍輿行(위민인피사여행)  종들이 피로할까봐서 수레 내려 걸어가니

  此心生處是靈明(차심생처시영명)  그 마음 생기는 것 그게 영명 아니던가

  昔賢已自原頭說(석현이자원두설)  그 원두야 옛 현자가 이미 한 말이지만

  天下平時此心平(천하평시차심평)  천하가 태평해야 이 마음도 태평이지


더위잡고 기어서 오르노라면 마치 계단을 걸러서 올라가는 기분이었다. 급기야 한 높은 등성이에 오르니, 천일대라고도 하고 또 천을대라고도 하는 곳이었다. 산의 중턱에 위치하고 있어 사방이 확 트이고 바라보면 놀라울 정도인데, 정양사 승려 대여섯 명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늙은 선승 보원이라는 자도 와서 맞아 주었는데 낙건에 가사 차림으로 얼굴이 깨끗하고 정신과 기운이 맑아 보여 산중의 중에 대해 호감을 가짐 직하였다. 그와 함께 솔뿌리 위에 앉아 사방을 두루 돌아보며 가리키고 묻고 했는데, 능호·영랑·비로·중향·향로·혈망·망고·백마·장경·시왕 등의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어오니, 옛 사람이 이른바 ‘일천 바위가 수려함을 시새우고 일만 골짜기 물이 다투어 흐른다’고 했던 말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생각되었다.

  그 중에서 비로봉이 가장 높고 중향봉은 더욱 기절했으며 혈망봉은 험준해 보이고 망고봉은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는 것이 마치 저희들끼리 영웅을 겨루는 듯했고, 백마봉․장경봉은 멀리 보이는 것이 마치 병풍을 줄세워 놓고 휘장을 쳐놓은 듯했으며, 영랑봉․향로봉․능호봉은 마치 서로 읍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었다. 그리고 시왕봉과 그 이하 관음․미륵․문수 등의 봉우리들은 모두 불가의 이름을 붙여 놓았고 또 마치 부처들이 줄지어 서고 나란히 앉아서 경을 읽고 도를 얘기하는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일만 골짜기에서 샘이 울고 거기에 솔바람 소리까지 섞여 있어 마치 비바람이 불어 오고 밑에서 뇌성벽력이 이는 것 같기도 했다. 승려들 말로는, 이 산 옛 기록에 일만 이천은 담무갈(曇無竭)이 머물던 곳이라고 했는데, 담무갈은 부처 이름이라고 하였다. 내 생각에는 담무갈이란 인도말인 듯한데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다. 그 승려 얘기는 비루하고 허탄한 말이었다. 아마도 옛분들은 이 산의 일만 봉우리 일천 봉우리가 모두 산신령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날따라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 오고 이슬기운이 차고 맑아 붉게 물들여진 모든 덩굴과 단풍잎으로 가을 기운이 산 속에 가득하였다. 게다가 또 푸르른 소나무 잣나무가 붉은색 사이에 섞여 있어 더욱 사랑스러웠다. 내가 여러 중더러 말하기를, 가을이 아직 무르익지 않았는데 우리가 너무 일찍 구경 온 것이 아니냐고 하자 보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대체로 무슨 물건이든지 구경을 하려면 한창이기 전에 해야지 한창인 때 하게 되면 때가 이미 지나쳐서 바로 사그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막 무르익으려고 하는 이때 여유 있는 운치로 구경하는 것이 좋지요.”

하기에 내가 이르기를,

  “老師의 말씀을 들으니 물건 보는 법을 잘 아시는 분이라고 하겠소. 옛사람 말에도, 꽃은 낙화 되어 흩어질 때 보고 싶지 않고, 술은 곤드레 만드레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역시 노사를 두고 한 말이구려.”

하였다. 그리고 이어 두 군에게 말하기를,

  “천지만물 모든 이치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은 좋찮은 것이네. 세상에서 부귀와 번화와 성색(聲色)을 누리고 있는 자들은 더구나 이 이치를 몰라서는 안 되네. 내가 언젠가 읊은 시 한 수가 있는데 그대들은 이 시를 기억해 주기 바란다.”

했더니, 克家가 그 시를 小記에다 적었다. 그리고 유군은 말하기를,

  “이 시는 아마도 그대가 뜻을 이루었을 때 지은 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 시는 이렇다.


    騎馬悠悠行不行(기마유유행불행)  말 타고 느릿느릿 가다가 말다가

    石橋南畔小童淸(석교남반소동청)  돌다리 남쪽 가에 동자 하나 청수하네

    問君何處尋春好(문군하처심춘호)  봄구경을 그대는 어디에서 하려는가

    花未開時草欲生(화미개시초욕생)  꽃이 아직 피기 전에 풀싹이 돋으려 한다네


  충암 김선생 원충(冲菴金先生元冲)이 중에게 준 비로봉시가 우연히 생각나 두 군에게 읊어 주었다.


    落日毘盧頂(낙일비로정)  해 지는 비로봉 정상

    東溟渺遠天(동명묘원천)  동해 바다 하늘 멀리 아득하네

    碧嵒敲火宿(벽암고화숙)  불 일구어 바위틈에서 자고

    連袂下蒼煙(연몌하창연)  소매 맞잡고 속세를 내려가네


그리고 내가 말하기를,

  “이 시야말로 고금의 시인들 작품 중에 걸작이다. 이 시는 우리 나라에만 없는 정도가 아닌데 애석하게도 우리 나라 사람들 가운데 이 시를 알아보는 자가 없어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지 못했던 것이다.”

하니, 두 군들도 동감이었다. 그리하여 서로 읊고 또 읊고 했더니, 사람으로 하여금 표연히 산 정상을 버리고 동해로 가고픈 생각이 들게 했다.

  晦翁의 ‘南岳韻’에 차운하여,


    九秋霜露滿天風(구추상로만천풍)  구월이라 서리 내리고 하늘 가득 바람인데

    天乙臺前一盪胸(천을대전일탕흉)  천을대 앞에 와서 가슴 한번 활짝 열었네

    詠歸何處尋行迹(영귀하처심행적)  시 읊으며 돌아간 곳 어디에서 찾아볼까

    直到蓬萊最上峯(직도봉래최상봉)  곧바로 봉래산 최상봉에 올라야지


하니, 다른 여러 사람이 화답을 하였다. 東樓에 가서 벽에 걸려있는 여러 사람들의 시를 보았다. 여러 사람들의 작품이 있었으나 그 중에서 企齋․湖陰․龍洲․淸陰․李天章․金道源․申伯潤의 시들이 읊을 만했고 거기에서도 기재․호음의 것이 최고여서 후인으로 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세도와 인재의 浮沈을 여기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 날 밤은 정양사에서 잤는데 보원과 얘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밤에 일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알아보았더니 望高峰이 정동쪽이고 凌灝峰은 북에 있어 이 절 위치가 남을 향해 午位로 되어 있고 동으로 아침 햇살을 받기 때문에 절 이름을 그렇게 지었던 모양이다. 용주의 시에 盲壑彰 이 세 글자가 있었는데 아무리 보아도 누구도 그 뜻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자는 초서를 쓰면서 잘못 쓴 것이라고 하였고, 혹자는 벽자라고 하기도 하면서 서로 한바탕 웃었다.


  5일(정미) 맑음. 중을 시켜 懶翁의 眼珠․葛布․珈黎 鐵鉢․瑪瑙․麈尾(주미) 등을 내오라고 하여 보았더니, 안주 하나는 색이 파랗고 작은 팔만한데 불가에서 말하는 사리(舍利)라는 것으로, 그것을 유리그릇에 담고 금으로 봉합한 다음 비단으로 겹겹이 싸놓았는데 그 곳 중들이 아주 보물로 지킨다는 것이다. 내가 듣기에는 나옹은 제자가 많아 대중을 현혹시킨다 하여 국법으로 베임을 당한 자여서 그 슬기가 별것이 아니었는데, 지금 중들은 그가 成佛하였다고 하면서 저렇게 존경하고 있으니, 무슨 까닭일까 싶어 그들에게 물어 보았더니, 그 중들 역시 그 사건 전말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사람 몸에서 구슬이 나온다는 것은 원래 없는 데서 나오는 것이 있다는 것으로 이치로 보아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나로서는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고금을 막론하고 승려 세계에서는 그 말을 절대 믿고 서로 전수하면서 높이 받들고 있기 때문에 도저히 깰 수가 없어 나로서도 끝까지 따질 수가 없었다.

  八角殿의 石佛을 보았다. 그 벽에 해묵은 그림이 있었는데 吳道子가 그린 것이라고 하지만 오도자가 조선에 왔었다고는 들은 바 없으니 그 역시 허탄한 소리인 것이다. 이 날 克家가 그 절의 대들보에다 이름을 썼다. 그리고 이 날 동쪽 누대를 두 번 올랐는데 누대 이름은 歇惺이었다. 시가 있는데 企齋의 시는,


    一萬奇峯又二千(일만기봉우이천)  기이한 봉 일만하고 그리고 또 이천인데

    海運飛盡玉嬋姸(해운비진옥선연)  바다구름 다 걷히자 아름다운 옥이로세

    少時多病今成老(소시다병금성로)  젊어서는 병만 앓다 이제는 늙었으니

    孤負名山此百年(고부명산차백년)  백년 두고 이 명산 이름만 듣고 만 격이네


하였고, 湖陰의 시는,


    萬二千峯領畧歸(만이천봉영략귀)  일만 이천 봉우리를 대강 짚고 돌아오니

    蕭蕭黃葉打征衣(소소황엽타정의)  쓸쓸한 낙엽이 옷 위에 지네 그려

    正陽寒雨燒香夜(정양한우소향야)  비 내리는 정양사 향불 피우는 밤에

    籧瑗方知四十非(거원방지사십비)  사십 평생 잘못 산 걸 거백옥이 알았다네


했으며, 청음의 시는,


    琳琅簷雨夜連明(임랑첨우야연명)  밤 지새워 내리는 처마 끝 비소리에

    臥聽山中萬瀑聲(와청산중만폭성)  산중의 폭포 소리 누워서 듣는다네

    洗出玉峯眞面目(세출옥봉진면목)  참모습이 나오도록 봉우리들 씻어 놓아

    却留詩眼看新晴(각류시안간신청)  날 개이자 시인의 눈에 뜨이는 게 그것이네


하였다. 식사를 마치고는 중 한 명을 데리고 혼자 천을대에 올라가서 이곳 저곳을 바라보면서 산봉우리와 골짜기를 가리키며 알아보았는데, 그 중의 松蘿峽은 新羅의 왕자가 있던 곳이고, 凌灝峯 放光臺는 고려 왕건 태조가 부처에게 절하던 곳이란다. 아, 왕자의 한 일은 장해서 漢의 北地王과 그 열렬함을 겨룰 만하고, 고려 태조의 그 굉장한 규모나 후한 덕은 宋 태조와 어깨를 겨눌 만도 했는데, 어쩌자고 異敎에 정신이 팔려 허탄한 말과 옳지 못한 유적을 후대에까지 남겨놓았는지.

  그 곳 산과 구릉의 형세를 대략 한 폭의 그림으로 그려 두었는데 후일 뛰어난 그림 솜씨를 만나게 되면 이 승경을 다시 그리게 하려고 해서이다. 또 시를 읊기를,


    邈邈松蘿峽(막막송라협)  아득히 먼 송라협이요

    迢迢凌灝臺(초초능호대)  높고 높은 능호대여라

    悠然發大嘯(유연발대소)  휘파람 크게 한 번 부니

    萬瀑隱風雷(만폭은풍뢰)  만폭에서 천둥이 이네


하였고, 또 읊기를,


    寵辱區區不足驚(총욕구구부족경)  구구한 영욕 놓고 놀랠 것이 뭐라던가

    九秋飛上衆香城(구추비상중향성)  구월에 중향성을 날아서 올라 왔다네

    直將被髮桴東海(직장피발부동해)  머리 풀고 곧바로 동해로 가 떼를 탈까

    且欲驂鸞襲太淸(차욕참란습태청)  봉을 타고 하늘 높이 올라도 보고 싶네


하였다. 보원이 하는 말이, 금년 봄부터 큰 새가 어디에서 왔는지 몰라도 산 속에 날아다니고 있는데 생김새는 野鶴 모양이고 목이 길고 꼬리는 검고 다리는 적색이고 몸은 껑충한데, 사람들이 보고 싶다고 말하면 반드시 제 몸을 돌려가며 보여주고 소리는 학의 소리를 내는데 아마 仙鶴인 것으로 지금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고 있지만 이 산 속 어딘가에 맑아서 하늘에까지 들린다는 것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시경》에서도, ‘학이 구고에서 우니 그 소리 하늘에까지 들리네’했고, 옛날 기록에도 역시 ‘난새와 봉황은 함께 무리 짓고 반드시 지대를 골라서 날며 때가 돼야 울기 때문에 그래서 仙禽이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새는 鸞鳳 같은 벗도 없고 師曠의 거문고 가락도, 相岳의 북 소리도 없는데 왔으며, 또 우는 소리가 여운도 없고 높지도 길지도 않아 저 혼자 그런 체하는 것이지, 사실은 학 같아도 학이 아니면서 선금 축에 끼어보려고 하는 것이리라. 진짜가 아니면서 이름이라도 빌려볼려고 함은 모든 물건이 다 그 모양인데 왜 새라고 그렇지 않겠는가.

  언젠가 致思軒 李黿이 쓴 金剛錄을 보았더니, 거기에 이르기를, “바위 틈에다 둥지를 틀고 사는 새가 있었는데 대개 평범한 들새였다. 그런데 중들이 학으로 잘못 알고 저를 학이라고 불러주니, 그 새가 반드시 둥지에서 나와서 제가 학이 아니라는 사실도 모르고 사람들에게 춤을 추어보였다.” 한 곳이 있었는데, 지금 그 새도 저 자신을 학으로 자처하고 있고 사람들도 학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도 깃털을 뽐내면서 사람들에게 과시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렇게 이름만 내고 스스로 감출 줄은 모른다는 것인가. 어쩌면 산새 들새들도 진세의 속된 인간들과 똑같은 생각이란 말인가. 지금 이 일이 치사헌이 써 놓은 것과 아주 비슷하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학이라는 것도 신령한 새여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지가 지금 천 년이나 되었는데 비슷하면서 진짜는 아닌 것이 하필 오늘에 나타났으니 그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내 그 모든 것을 듣고 묵묵히 앉아 마음 속으로 탄식을 했었다. 유군이 회암의 ‘廬山韻’을 내놓으면서 나더러 화답하라고 하기에 심심풀이 삼아 읊어 보았다.


    三韓三神山(삼한삼신산)  삼한의 삼신산 중에

    金剛最爲傑(금강최위걸)  금강산이 제일 걸출하다네

    銀根五百里(은근오백리)  둘레 오백 리를 깔고 앉아

    邈然與世絶(막연여세절)  세상과는 인연을 끊고

    仙曇所窟宅(선담소굴택)  불가의 소굴 되어 있는데

    雲樹何明滅(운수하명멸)  구름 속 나무는 보였다 말다하네

    我來屬秋晴(아래속추청)  내가 왔을 때 맑은 가을이어서

    嶽峀正森列(악수정삼렬)  빽빽이 줄 서 있는 묏부리들

    憑睡挹淸灝(빙수읍청호)  기대 졸며 맑은 기운 들이키고

    杖策凌嵽嵲(장책능체얼)  지팡이 짚고는 높은 곳도 가소롭다네

    勝遊自此始(승유자차시)  구경은 이제부터 시작이라

    吾將窮跡轍(오장궁적철)  내 두루 다 밟고야 말리


유군의 시는,


    金剛天下勝(금강천하승)  금강은 천하 절경이요

    夫子一代傑(부자일대걸)  부자는 당대 영걸인데

    名山配高士(명산배고사)  명산이 고사와 만났으니

    豈不稱兩絶(기불칭양절)  양절이라 해야 하지 않겠는가

    遊爲資仁智(유위자인지)  인과 지에 보탬 되려고 놀지만

    志在憫寂滅(지재민적멸)  불자들 민망하기도 하지

    賤子忻附驥(천자흔부기)  기마 꼬리에 붙어 온 이 존재야

    陪賞豈行列(배상기행렬)  어떻게 나란히 서서 구경하겠습니까

    見公記勝詩(견공기승시)  승경 읊은 공의 시를 보니

    高幷玉峰嵲(고병옥봉얼)  높기가 옥봉과도 같네요

    丹丘興靡窮(단구흥미궁)  신선 사는 곳 구경 다하려고

    復膏仙洲轍(부고선주철)  그리로 가는 수레에 다시 기름칠했다네


하였다. 또 歇惺樓 시에도 차운했는데,


    蓬萊一萬二千峰(봉래일만이천봉)  봉래산 일만 이천 봉우리가

    高出靑天揖岱宗(고출청천읍대종)  푸른 하늘 높이 솟아 태산과 마주섰네

    玉巘竦奇形矗矗(옥헌송기형촉촉)  옥 같은 봉우리들 우뚝하게 솟아 있고

    銀巒鬪壯勢重重(은만투장세중중)  장중을 자랑하는 은빛 같은 봉도 있어

    危巖古樹巢仙鶴(위암고수소선학)  바위 끝 고목에는 둥지 틀어 학이 살고

    怒瀑深湫閟毒龍(노폭심추비독룡)  폭포 밑 깊은 못엔 독룡이 살고 있다네

    最時正陽秋霽後(최시정양추제후)  제일 좋긴 정양사에 가을비 개고 난 뒤

    數聲淸磬發深松(수성청경발심송)  소나무가 경쇠처럼 울어대는 소리라네


라고 지어, 둘 다 써서 나에게 주었다.

  내가 보원에게 이르기를,

  “유가에는 知行이라는 것이 있고, 불가에는 定慧라는 것이 있는데 혜가 정을 낳는 것입니까, 정이 혜를 낳는 것입니까?”

했더니, 그는,

  “아마 정이 혜를 낳는 것이지요?”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우선 정혜의 이치를 모른다면 어떻게 정을 지킬 수 있을 것이며, 또 마음을 지키는 定力이 없고서야 마음의 眞覺이 또 어디에서 나오겠습니까.”

하니, 보원이 이르기를,

  “유가에도 그러한 법이 있고 그에 관한 학설이 구구한데, 스님은 정말 말씀을 잘 했습니다. 다만 유가에는 모든 이치가 다 갖추어져 있으므로 그 이치를 알려고 하는 것은 장차 그대로 실행하기 위해서인데 불가에서는 空明 그것만을 지키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했더니, 그도 그렇다고 대답하고서 이어 우리 유가의 道統 연원에 대하여 묻기에 내가 대략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또 불가의 衣鉢 전수 관계를 물었더니, 그도 대답해 주었는데 그의 말은 達摩를 宗으로 삼고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달마는 벽을 향해 앉아 수도만 하다가 결국 남이 준 독약을 먹고 죽고 말았는데 도를 통했다는 자도 그럴 수 있습니까?”

했더니, 그의 대답이,

  “달마는 각박한 세상 인심 그게 싫어서 일부러 입적한 분이니 그의 몸은 서방 정토로 들어간 것입니다.”

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浮屠氏들은 원래 幻說을 많이 하니까요.”

하고 이어, 불가에는 禪과 敎 두 파라 있는데 대사는 어느 쪽이냐고 물었더니, 그의 대답이,

  “經敎를 대강 듣고 염불이나 일삼고 있지 心學에 관한 공부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그와 이틀 밤을 함께 지냈는데 언제나 밤중이면 彌陀 소리가 들려왔다.

  金剛山이 높고 가파르고 수려하기 동방에서는 으뜸인데, 그 산맥은 長白山에서 시작되어 劍山에서 높이 치솟고 鐵嶺을 가로질러 楸池에서 기복을 이루고 이어 여기에서 서려 이루어진 것이다.

  툭 튀어난 봉우리가 凌顥峯인데 그 봉은 흙과 돌이 섞여 있고 돌무더기 산이 죽죽 뻗어가다가 펄쩍 뛰어올라 영랑재[永郞岾]가 되고 또 갑자기 높이 솟아 毘盧峯이 되었는데 바위 전체가 솟아 봉우리가 되었기 때문에 곧바로 하늘까지 치솟아 높고 거대하기로는 이와 맞먹을 봉우리가 없다. 비로봉에서 형세가 한풀 꺾여 내려오면서 험준하게 첩첩으로 싸인 것이 衆香城인데 푸르른 바위 절벽이 둘러서서 성을 이루고 하얀 바위들을 바라보면 그 빛이 마치 분을 발라놓은 것 같다. 그리고 바위 사이로는 노송나무․잣나무․海松․蔓香나무들이 하나의 무늬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서 연달아 日出峯․月出峯이 솟아 있고, 그 아래 가로로 줄서 있는 것이 白雲臺․금강대․大香爐․小香爐이고, 그 시냇물은 萬瀑洞인데 百川洞의 물과 만나서 남으로 흘러 淮漢의 상류가 된다. 그리고 또 서쪽으로 가서 望高峯이 되었는데 그 높이는 비로봉 다음 가고, 또 그 다음으로 白馬․玄登 등의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서쪽을 향하여 엎드리려는 듯하다. 또 남으로 바닷가까지 나가서 들을 끼고 달려가 놈은 天吼․雪嶽․寒溪가 되었고, 서남으로 간 놈은 오대산이고, 곧바로 남으로 달려간 놈은 嶺의 좌우 그리고 湖의 서남쪽 줄기가 되고 있다.

  비로봉 서쪽은 內山이라고 하는데, 바위가 우뚝우뚝 서있고 바람은 서풍을 받고 햇볕은 석양 햇볕을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그리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로봉 동쪽은 바위 사이로 흙이 꽤 많고 아침 해가 비치는 데다 바다가 가까이 있어 그 기운까지 받기 때문에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해를 가리우고 구름 위까지 치솟아 있는데 그 쪽은 外山이라고 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동쪽으로 뻗은 가지는 백 리도 다 못가 동해에 이르러 끝나고, 서쪽으로 뻗은 가지는 淮水 서쪽을 끼고 바다까지 다 못가서 楊江과 만나 거기에서 끝나는데 천 리 절반 정도로서 가깝고, 북으로 뻗은 가지는 높은 산이 첩첩이고, 둥르렇게 서려 한 골짜기를 형성하고 있는데 그것이 九龍淵이다. 만폭동은 바위낭떠러지가 수려하고 수석도 많아 지팡이 짚고 신발 신고도 건널 만하기 때문에 구경 온 사람들이 왕래하고 있으나, 구룡연은 어두컴컴하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으며 용과 새 짐승들이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낮에도 風霆이 일고 괴물이 나타나고 하여 인적이 미칠 수 없는 곳이다.

  내 늙고 병들어 짧은 지팡이에 동자 관자 거느리고 비로봉 정상에 올라가서 雲霧를 딛고 비바람 맞으며 굽이굽이 모든 산천 다 구경하고 동서남북을 향해 내 영혼을 마음껏 드러내 보이지 못한 것이 한이고, 또 높은 봉우리 가파른 벼랑을 타고 넘어 구룡연 깊은 못가에 가서 괴물들이 사는 굴들을 훑어보고 험준하고 으슥하고 기기괴괴한 곳까지 다 구경하므로써 나의 이 가슴속에 쌓인 우울하고 답답한 회포를 다 털어버리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내가 벌써 이렇게 늙었단 말인가. 李栗谷 叔獻선생이 소년 시절 무슨 일로 인하여 집을 떠나 이 산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중들에게 물어보았으나 그 일에 대하여 들어서 알고 있는 자가 없었다. 그 중들이야 물론 무식한 것들이지만 지금 1백 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 遺響이 아득할 것은 당연한 일이리라.

  밤에 보원과 얘기를 하는데 보원이, 鄭知常은 어떤 인물이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고려 때 文士이고 그의 시가 깨끗하고 민첩하여 唐人의 기풍이 있었으나 요망한 중 妙淸에게 현혹되어 나랏일을 그르치고 말았으니 보잘 것 없는 사람이지요.”

했더니 또, 金富軾은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내 말이, 문장력이 있어 三國史를 썼고 장군이 되어 묘청의 난을 토평하기도 했다고 했더니, 그가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는 부식이 정지상과 명예 다툼을 했는데 번번이 이기지 못하자, 이어 지상을 모함해서 죽였다가 뒤에 결국 지상의 영혼에게 되죽음을 당했다고 합디다. 그게 무슨 좋은 사람이겠소.”

하면서, 부식이 죽은 일을 얘기했는데, 마치 竇嬰(두영)과 田蚡(전분) 사이에 있었던 일처럼 말하니 얘기가 매우 해괴하였다. 나는 전에 들은 바 없는 얘기이기에 여기에 써 두었다가 언젠가 누구에게 물어보기로 하겠다. 보원의 말에 의하면 김부식이 언젠가 詩官으로 院에 들어가 원의 문에다 시를 쓰기를,


    燭盡天將曉(촉진천장효)  촛불이 다하자 날은 새려고 하고

    詩成句已香(시성구이향)  시가 이루어지니 구절이 향기롭네

    滿庭人擾擾(만정인요요)  뜰 가득히 사람들 시끌시끌한데

    誰是壯元郞(수시장원랑)  장원을 할 자는 뉘라던가


했는데, 지상이 그 시를 보더니 즉석에서 붓을 들고 三更․八角․落月․不知 이 여덟 자를 써서 다섯 자씩 된 위에다가 각기 얹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식이 자기 재주로는 그를 따르지 못할 것을 알고 드디어 모함을 하게 된 것이라고 운운하였다. [하략]


출처 : 금강산문학
글쓴이 : 금강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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