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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1. 동유기(이곡)

회기로 2010. 1. 24. 19:52
 

東遊記(李穀)1)


  이곡(1298-1351) 고려 말엽의 학자로 호는 稼亭이며, 牧隱 李穡의 아버지이다. 원나라 제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라 중국의 문사들과 교류한 뒤, 귀국하여 政堂文學이 되고 韓山君의 封爵을 받았다. 문장에 능했으며, 가전체 작품인 「죽부인전」이 『동문선』에 전하고, 그의 문집인 『가정집』제5권에 이 글이 실려 있다. 시호는 文孝이며 백이정․우탁․정몽주와 함께 경학의 대가로 꼽힌다. 현전하는 금강산 기행문으로써 가장 오래된 이 글은 고려 1349년(충정왕 1년) 8월 14일부터 9월 21일까지 금강산을 중심으로 하는 관동지방의 명승지들을 유람하며 쓰여졌다. 8월 14일 송도를 출발했지만 실제 금강산 유람 기간은 8월 22일부터 9월 4일까지 13일 동안이다. 국도, 총석정의 사선봉, 삼일포의 사선정, 성류굴 묘사 부분은 아주 세세할 뿐만 아니라 그 절경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읽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운 경관에 절로 가슴이 뛴다.


  충정왕(忠定王) 1년 가을, 금강산을 구경하기 위해 14일 송도(松都)를 떠났다.


  8월 21일, 천마령(天磨嶺)을 넘어 산 밑 장양현(長陽縣)에서 자니 산에서 30리 떨어진 곳이다.

  아침밥을 일찍 먹고 산을 오르려는데 구름과 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어두웠다. 고을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이 풍악산을 구경하러 왔다가 구름과 안개 때문에 구경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는 예가 종종 있다 하므로, 일행이 모두 걱정되어 마음속으로 그런 일이 없기를 기원하였다.

  산을 5리쯤 앞두고 어두운 구름이 차츰 엷어지면서 햇빛이 퍼지더니 절재(拜岾)에 오르자 하늘이 걷히고 날씨가 맑게 개어 산의 모습이 칼로 도려낸 듯하고, 1만 2천 봉우리 하나하나가 셀 수 있을 정도로 또렷이 드러난다. 금강산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지나게 되는데 잿마루에 오르면 산이 보이고, 산을 보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되므로 재 이름이 절재이다.

  옛날에는 재에 집이 없었고, 돌을 쌓아 대를 만들어 쉴 곳을 마련했었다. 원나라 순제(順帝) 지정(至正) 정해년에 지금 자정원사(資正院使)로 있는 강금강(姜金剛) 공이 순제의 명을 받들고 와서 큰 종을 주조하여 재 위에다 종각을 세워 달고 그 옆에 중이 거처할 집을 지어 종 치는 일을 맡게 하였다. 그 우뚝한 단청이 설산(雪山)과 조화되어 산 속의 장관을 이루었다. 정오가 채 못 되어 표훈사(表訓寺)에 도착해서 잠깐 쉬었다. 사미승이 길을 인도하면서,

  “동쪽에 보덕관음굴(普德觀音窟)이 있는데 경치가 아름다우므로 사람들이 반드시 먼저 그곳으로 갑니다. 그러나 길이 험합니다. 서북쪽에 있는 정양암(正陽庵)은 고려 태조가 창건한 암자로 법기보살(法起菩薩)의 상을 모셨는데, 약간 높지만 가까워 오를 수 있으며, 그곳에 오르면 풍악산 모든 봉우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한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관음보살이야 어디인들 없겠는가? 내가 여기 온 것은 산 경치를 보기 위함이니, 그 암자로 먼저 가는 게 어떻겠는가?”

하고는 붙잡고 기어서 오르고 보니 과연 듣던 말과 같아 마음에 들었다. 보덕굴로 가려 했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고, 산속에서 잘 수도 없을 것 같아 신림암(新林庵)과 삼불암(三佛庵) 등 여러 암자를 둘러보고 시내를 따라 내려왔다. 저물녘에 장안사(長安寺)에 이르러 잤다. [하략]

출처 : 금강산문학
글쓴이 : 금강산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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