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유금강산록(유운룡)
동방의 가장 기이한 경치로 일컬어지는 것이 곧 관동의 금강산이다. 계축년 가을에 조부께서 수성군의 수령으로 나가시게 되었다. 나는 그때 아직 어려서 오랜 바람을 이룰 수 없다가 정사년 가을, 서울로부터 근친하러 왔을 때에야 드디어 마을 사람 황후징 정숙과 더불어 가기로 약속했으니, 때는 9월 경술일이었다.
경신일, 오시가 지나 서문으로부터 나와서 바다를 따라서 반암 나루에 이르렀다. 큰 소나무들이 높이 치솟아 녹음이 십리이고, 길이 그 사이로 나 있었다. 맑은 흥취를 스스로 금할 수가 없어서 입으로 율시 한 수를 지었다. 거탄진을 지나 열산현에서 식후의 낮잠을 즐겼다. 청풍 정추의 열산관 시에 차운하였다.
천산은 겹겹이 길과 함께 굽이굽이 펼쳤고
가을은 깊어 누런 국화는 바람에 향기를 날리네.
마음은 이미 금강에 있어 돌아갈 흥을 재촉하니
채찍을 휘두르며 이미 날 저문 것도 알지 못하네.
대구 미어점에 투숙했다. 정숙을 기다리며 모래톱을 거니노라니, 얼마 안 되어 달이 떠오른 후에야 이르렀다. 대개 정숙이 사는 곳이 마을과 꽤 멀어서였다. 가게 앞에는 자그만 포구가 있었는데, 빙 두른 것이 가히 밭 두어 이랑이 되고 기암괴석이 뒤섞여 늘어섰다. 안개가 공중에 자욱하여, 달과 별의 그림자가 잠겨 있고, 거울 면을 닦아놓은 듯하여 속세의 떠들썩함은 아득히 멀어 고요했다. 흥이 일어 어부로 하여금 배 두 척을 연결하게 하여 일렁이는 물결에 띄웠다. 잔을 들어 달을 마시고, 취하자 일어나 춤을 추고 절구 한 수를 지었다. 노를 돌려 기슭에 오르니 밤이 이미 두 점을 쳤다. 응운 최종룡과 업정 최이가 술을 가지고 와서 같이 잤다.
신유일, 定林에서 작별하며 18일에 화진에서 모이기로 약속하였다. 이에 바닷길을 따라 무송정 밑에 이르렀는데, 모래는 십리에 펼쳐지고 바람은 조용하고 파도도 고요한데 고기잡이배가 드나드는 것이 백 척쯤 되었다. 해당화 꽃밭 속에서 모래가 말발굽 밑에서 소리를 냈다. 정숙이 먼저 절구 한 수를 읊고 내가 차운하였다. 명파역을 지나 태강역에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주인 김숙년이 시골 술을 보내주었는데 예로 대우함이 매우 도타웠다. 날이 저물어 숙고사에 투숙했는데, 숙문스님이 나와 보고 유산하는 차례를 자세히 말해 주었다.
임술일, 행장을 간단히 꾸렸는데도 날이 늦어서야 숙고사로부터 반암에 이르러 말을 먹였다. 장령을 넘어서 현교에 이르니 높이 질러놓은 다리가 위험하여 말을 탈 수가 없었다. 말을 끌고 한쪽 모로 걸어갔다. 얼마 안 가 말이 다리 틈으로 빠져서 거의 죽게 되었기에 밧줄로 끌어올렸다. 유점동 입구에 이르니 노송나무, 잣나무가 하늘까지 빽빽하였다. 누각이 하나 있는데 ‘산영루’라 하였고, 벽 위에는 제영한 시들이 쓰여 있었다. 절의 단청은 계곡에 비치고 있었다. 중이 나와 맞으며 차를 끓여 주었다. 재상 심수경의 시에 차운하니 정숙이 즉시로 차운하였다. 잠시 후 범종루에 들어갔다. 황금색과 푸른색이 황홀히 빛나 사람의 마음과 눈을 현혹하였다. 절을 두루 돌아보고는 흥복료에서 쉬고 산영루로 돌아왔다. 주지승이 해묵스님을 길 안내로 보내주어 마상암에 올라갔다. 느지막이 성불암에 이르렀다. 동쪽이 훤히 트여 바다가 눈 아래 있었다. 불정대에 이르러서는 나무를 붙잡고 오르는데 마음이 두렵고 흐트러져서 아래를 내려다볼 수가 없었다. 서북쪽으로 십이폭포를 바라보니, 절벽은 모두 흰데 폭포의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서, 은하의 물결이 터져 푸른 하늘이 새는 듯싶었다. 불정대 가운데 굴이 있는데 깊이를 헤아릴 수 없었다. 아래로 원통굴을 바라보니 바위에 가로대어 집을 만들었다. 정숙이 절구 한 수를 지어 입으로 읊고, 내가 차운하였다. 불정암을 내려와서 사방으로 좋은 경치를 보고 성불암에 돌아와 잤다.
계해일, 일출을 보려고 했는데 구름에 가려서 볼 수가 없었다. 험한 산길을 따라 내려와서 도솔암에 이르렀다. 내수성 냇가에서 점심 먹고 쉬고는 대수성 고개를 넘어 원적가 시내에 이르러 쉬었다. 절구 한 수를 읊었다.
길이 험하니 발 디디기도 어려워
피곤하여 시냇가에 앉아 보네.
문득 앞 길을 물어 보느니
구름 안개를 몇 겹이나 뚫어야 한다고 하네.
묘길상을 지나는데 골짜기 물이 앞에서 울렸다. 불지암에 이르러 거빈을 지나는데 바위에 의거하여 지은 집에 지붕을 얽어놓은 것이 겨우 두어 칸쯤 되었다. 절벽을 타고 반야암으로 내려오니, 암자가 빈 지 이미 오래 되었다. 마하연의 절에서 잤다. 대개 내산의 맥은 용이 뛰고 호랑이가 웅크린 형세이고 구름이 겹겹이 쌓였으며, 절벽이 둘러싸인 데 등나무가 얽혀 있어 사람이 다닐 수 없는 곳이다.
갑자일, 사자암을 두루 보고 고개를 넘으면서 방광․개심 두 대를 올려다 보았다. 험해서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원통사에 이르러 병산에서 아침을 먹고 천덕․묘덕을 두루 다니니 시야가 확 트여서 아주 볼 만했다. 보현령을 넘어 정양사에 이르니 지전스님이 나와 대접했다. 진헐대에 앉아 수천봉을 두루 헤아리니 기이한 뛰어난 경관이었다. 산세가 서쪽으로는 무주로부터 시작해서 만폭동에서 멈추었다가 정양에서 맺어져 그 기이함을 드러내고, 동쪽으로는 불정 바위 밑에서 시작하여 마하연에 이르러서야 다하니 진실로 불가에서 이르는 바 구름 위로 솟아 바닷가까지 이른 황룡의 기세와 같았다. 내가 정숙에게 이르기를 “이런데 어찌 시가 없을 수 있겠나.”하고 먼저 오언 장편시를 읊었다.
천지의 알차고 아름다운 것만 모았으니
기이하고 신괴함 어찌 이루 다 말하랴.
우뚝 솟아 동해를 누르고서
풍상을 몇 번이나 겪었는가.
골짝의 단풍은 붉기가 꽃 같고
바위는 희기가 눈 같다네.
온갖 봉우리 교묘히 깎여
사방에 가지런한 눈썹처럼 늘어섰네.
구름은 백 척 남기에서 나고
바람은 천 길 구멍에서 나오네.
급한 물은 콸콸 흐르고
얕은 골은 조용히 울고 있네.
가장 높은 곳은 신선이 노는 곳
안개로 막아져 사람 자취 끊겼네.
지팡이 짚고 덩굴을 뚫고 가노라니
자주 의관이 찢기네.
절과 암자는 천여 곳을 헤아리니
모두 가부좌하고 적멸을 이야기하네.
속세인으로 아쉬웁기는
잠깐 사이에 산과 헤어지는 것.
정숙이 차운하여 짓기를,
좋은 경치 탐내는 속세 사람이
일찍이 이 경치 이야기 들었네.
산에 들어 신선을 불러선
세월이 얼마나 흘렀나 묻네.
맑은 기운은 숲의 정기를 모음이요
눈도 오지 않았건만 산빛은 눈과 같네.
울창하여 용과 호랑이가 걸터앉은 듯
빽빽하여 칼과 창이 늘어선 듯하네.
푸른 내는 천 길 벼랑에 비꼈고
흰 구름은 바위 구멍에 쌓였네.
검은 학은 깊은 숲속에서 울고
맑은 샘은 그윽한 골짜기서 목메는데
하물며 가을 구월이 오니
산빛은 더욱더 맑디 맑아라.
흥겨워 와서 반석에 앉아
긴 휘파람 소리 구름을 뚫고 날아가네.
지난날 속세의 생각들은
말끔히 모두 없어져 버리니
어느 해에 다시 산에 오려나
산승은 이별을 이야기하네.
내려와 표훈사에 드니 지정스님이 맞아들여 차를 대접해 주었고 곧 저녁밥을 먹었다. 밤에는 더불어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을축일,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가랑비가 흩날렸다. 앉아서 날이 개기를 기다리노라니 해가 이미 높아졌다. 벽에 있는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천지에 가득한 가랑비에 앞 내는 어둑하고
새벽 안개 산에 가득하니 하늘이 나직하네.
아름다운 경치를 찾아 나서며 어찌 산길 어둔 것 혐의하리
지팡이에 의지하고 다만 해가 질까 걱정할 뿐.
정숙이 오언으로 차운하여 지었으니
산색은 맑은 계곡에 비치고
다락은 구름가에 우뚝 솟았네.
오가며 아름다운 경치를 가슴에 품으니
해가 서쪽 하늘에 있음도 깨닫지 못하네.
잠시 쉬다가 나가 바라보니 뭇 산들이 구름 안개 속에 은은히 숨었는데 어떤 산은 전체가 드러나고 어떤 산은 반만 보이기도 하며 눈 깜짝할 사이에 온갖 모양으로 변하였다. 지정스님과 함께 만폭동에 다다랐다. 골짜기는 널찍하니 큰 벽이 사방을 둘러싸고 폭포가 거꾸로 매달렸는데 울리는 소리가 우레인 듯 천둥소리인 듯하였다. 건암에 이르렀다. 바위 가운데 구멍이 있는데 지정스님이 “이곳은 관음보살께서 머리를 감으신 곳인데 지금도 자취가 남아 있지요.” 했다. 아! 사람들이 괴이함을 좋아함이여. 바위에 꽤 오래 앉아 있다가 지정스님과 헤어져 계곡을 따라 보덕굴에 이르렀다. 굴은 깎아지른 낭떠러지 위에 있었다. 벼랑을 뚫어 기둥을 세우고 구리로 겉을 싸서 그 위에 암자를 세웠다. 쇠줄로 출입을 편하게 하였는데 나는 쇠줄을 부여잡고 전전긍긍하면서 그 굴에 들어갔다. 창문을 열고 아래를 보니, 허공에 있어 몸에 소름이 돋았다. 아래 골짜기에 이르러서 올려다보니 천궁인 듯했다. 화룡연에서 쉬고, 묘길상에 돌아와서 점심을 먹고 낮잠을 잤다. 안문령에 이르니 안개가 산천을 뒤덮고 길도 또 험했다. 상원에 이르니 날이 저물었다. 혜묵에게 의지하여 구시령을 넘어 적멸사에 이르렀다. 날이 장차 어두워지므로 드디어 머물러 잤다.
병인일, 새벽에 큰 눈이 내려 깊이가 두 촌쯤 쌓였다. 나그네 마음이 무료하여 절구 하나를 읊었다.
앞 시내는 어느 곳이뇨
다만 졸졸 흐르는 소리만 들리네.
눈을 무릅쓰고 백전을 지나 환희령에 올랐다. 사방의 산이 온통 옥으로 깎아놓은 듯했다. 발연의 앞 고개에 이르니 일주스님이 나와 맞았다. 산에서 입었던 옷과 신발을 모두 갈아입고 술을 데워 몇 순배 마셨다. 폭포를 보면서 스님으로 하여금 운을 부르게 하여 한 구절을 읊었다. 말을 매어 놓고 도암객관에 묵으니 子正 安軼(안질)이 와서 도란도란 이야기했다.
정묘일, 자정과 더불어 동헌에서 밥을 먹고, 곧 고삐를 나란히 하여 나섰다. 배가 선포의 어귀에 떴는데 어슴푸레하여 스스로도 그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중류에서 반석으로 유람하였다. 매향비를 찾아갔는데 비에 씻기고 바람에 갈려 글자들의 본 모습이 없었다. 암석 위에 붉은 글씨 여섯 자가 있으니 “述郞徒南石行”이었다. 자정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郡의 나이 많으신 분들이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사선이 있어 술랑, 영랑, 안상이고 그 하나는 이름이 잊혀졌는데 혹자는 남석행이 그들 중 하나라고 하기도 합니다.”하였다. 붉은 글씨 밑에 비가 또 하나 있는 것은 상국 홍귀달이 만든 것이다. 배를 띄워 사선정에 정박했다. 정자는 겨우 두어 칸이었는데 풀로 지붕을 이었다. 자정이 일러주길 옛날에 여기에서 사선이 놀았으므로 정자를 짓고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하였다. 북쪽에는 몽천이라는 이름의 암자가 있었다. 저녁에 자정과 헤어지고 말을 몰아 남강을 건너서 대강에 이르니 어두워졌다. 말을 달려 명파역에 투숙하였다.
무진일, 무송정을 지나 잠시 쉬고 열산에 이르렀다. 권천경․전응성․최종룡․최탁이․정이 등이 내가 온다고 듣고 화진에서 맞아주어 잘 놀고서야 파해서 달과 함께 열산관에 와서 묵었다. 대개 산에 있던 4일 동안 혹은 길이 험하여, 혹은 안개 때문에, 혹은 피곤하여 모두 다 구경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대충 말하여도 진실로 천하의 기이한 경관이어서 비록 왕포와 양웅, 사마상여와 장공의 붓으로라도 오히려 다하지 못할까 두려운데 하물며 나의 짧은 필력으로 어찌 능히 한 구석이라도 그려낼 수 있겠는가? 그 본말을 대략 위와 같이 적어둔다. 정사년 구월에 화산후인 복고재는 쓴다.
※이혜순․정하영․호승희․김경미(공저), 조선 중기의 유산기 문학, 집문당, 1997. pp.185-191.
<원전> 유금강산록, 柳雲龍, 《謙菴先生文集》卷5
'전통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0) | 2010.01.24 |
---|---|
[스크랩] 저승에서도 퇴계선생을 모시는 월천 선생 (0) | 2010.01.24 |
[스크랩] 25. 금강산기(배용길) (0) | 2010.01.24 |
[스크랩] 28. 풍악행(윤휴) (0) | 2010.01.24 |
[스크랩] 20. 풍악행(이이) (0) | 201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