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한 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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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파 : 퇴계 학파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타양서원(陀陽書院/일직 조탑리; 손홍량, 김자수, 류중엄), 분강서원(汾江書院/농암 이현보, 금계 황준량, 파산 류중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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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문하의 안자(顔子)
선배들이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천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라 일컬었다. --------------------------------------------------------------------------------- 류중엄(柳仲淹, 1538~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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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柳仲淹):1538(중종 33, 무술)∼1571(선조 4, 신미). 본관 豐山. 자는 景文•希范. 호는 巴山. 公奭의 子. 이황 문인.제향:陀陽書院•汾江書院. 유고 약간 편이 『巴山逸稿』에 전함. ▣참고:「行蹟」(柳元之 撰) 집필:김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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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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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류선생 유허비명 병서 (巴山柳先生遺墟碑銘幷書)
인물(人物)의 태어남은 지령(地靈)을 받아서 정기(精氣)가 한데 뭉치어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인걸은 지령의 것이니라. 우리 류씨(柳氏)의 종가는 하회(河回)마을인데 산과 물이 태극형(太極形)으로 서로 감고 돌아가 자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뛰어난 지세(地勢)요 이름난 구획(區劃)이니라.
그리하여 처음으로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은 고려말기(高麗末期)에서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전서선조(典書先祖)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 사이에 자손(子孫)이 대대로 살아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성씨(姓氏)가 지키고 보호(保護)한 유가(儒家)의 커다란 터전인 것이다. 아, 함께 흠모(欽慕)할 것이야!
전서공(典書公)의 덕(德)을 쌓아서 유복(裕福)해진 뒤에 음덕(蔭德)이라 윤택(潤澤)함이 쉬지않고 흘러서 6세(六歲)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입암(立巖), 귀촌(龜村), 권옹(倦翁), 파산(巴山) 여러 어진이가 나란이 함께 하나의 문중(門中)이요 잇따라 문경공(文敬公), 문충공(文忠公)인 맏과 아우의 선생이 있어서 크게 일으켰으며 숲이 무성(茂盛)하게 우거지듯 영남(嶺南)의 빛나는 문벌(門閥)이 되었으니 드러났다고나 할 것인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을 서로 받아야 다스려지는 것이니라.
삼가 우리 파산(巴山)선생(先生)을 생각하건데 본관(本貫)은 풍산(豊山) 성(姓)은 류씨(柳氏) 휘(諱)는 중엄(中淹) 자(字)는 희범(希范) 초자(初字)는 경문(景文) 호(號)는 파산(巴山)이라 하였다.
"동네의 북쪽에 길다란 뱀의 형국(形局)이라 용(龍)이 내려와서 살았다"고 하였다. 속세(俗世)에서는 갱작등(更作嶝)의 뜻으로 이름한 것이다.
위조상(祖上)의 휘(諱)는 백(伯)으로서 고려말기(高麗末期) 은사급제(恩賜及第)이다. 실묘(失墓)한 곳에 단(壇)을 모아 비(碑)를 세우고 거듭 전(傳)해 오고 있다. 휘(諱)는 보(보)로써 예빈경(禮賓卿)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되었다. 아들의 휘(諱)는 종혜(從惠)로서 조선(朝鮮)에 들어가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상리(上里)로부터 향리(鄕里:河回)에 들어간 할아버지이다.
아들의 휘(諱)는 홍(洪)으로서 좌군(佐軍)의 사정(司正)이다. 이는 선생(先生)의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증조(曾祖)할아버지의 휘(諱)는 소(沼)로서 호군(護軍)이며 사복시정(司僕시正)에 추증(追贈)되었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자온(子溫)으로서 진사(進士)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버지의 휘(諱)는 공석(公奭)으로서 참봉(參奉)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서 휘(諱)는 응삼(應參)의 따님이다. 출계(出系)하였는데 작은 아버지의 휘(諱)는 공계(公季)로서 참봉(參奉)이다. 그 뒤를 이었다.
선생(先生)은 가정(嘉靖), 무술(戊戌,1538年)에 태어났으며 융경(隆慶) 신미(辛未,1571年)에 세상(世上)을 떠났으니 해를 누린지 삼십사년이다.
태어나면서 청렴(淸廉)하고 순박(淳朴)하고 평안(平安)하고 정허(靜虛)하였다. 일찍 도산(陶山)의 문하(門下)에 올라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날마다 정진(精進)하였으니 총애(寵愛)를 입을 수 있었다.
스승과 문인(門人)사이에 선생(先生)에게 준 서찰(書札)에서 말하기를 "늘 생각하건데 벗이 있었다면 그대와 놀았으나 각각 사연(事緣)이 있었던 까닭으로 늘 그대와 함께 같은 곳에서 할 수 없었으나 자질(資質)로써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功)이 슬퍼고 한(恨)스럽지 아니한가?" 또 말하기를 " 늘 동류(同流)의 동배(同輩)를 생각하건데 중화(中和)의 성정(性情)에 가깝고 그리고 지행(志行)과 독학(篤學)으로 현인(賢人)과 같은 사람이 쉽지 아니한데 한둘은 헤아려진다" 라고 하였다. 곧 그것에 기대(期待)하고 장학(奬學)을 바라보면 조정(調整)의 절실(切實)함이니 가히 이것으로 미루어 상상(想象)할 것이니라. 또 집안에 있어서도 입암(立巖), 귀촌(龜村), 모든 종형(從兄)과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도의(道義)는 스스로 하나의 집안을 이뤘으니 정말 이른 바 등림(鄧林)의 좋은 재목(材木)일 것이니라.
아! 선생(先生)이 나가서는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많은 제자(弟子)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가 되었고 들어가서는 하회(河回)마을에서 여러 현인(賢人)이 되었으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성숙(成熟)해질 무렵 중도(中途)에서 갑자기 요절(夭折)하였다.
하늘은 어찌 그르르 주어서 이미 두터웠으나 그를 빼앗기에 이토록 빨랐을까? 비록 수면(壽命)이라 말할 것이나 의외(意外)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문중(門中)의 슬픔이요 사문(斯文)의 액운(厄運)이다. 그렇다. 성품(性稟)은 순박(淳朴)하고 자질(資質)은 정허(靜虛)하여 도(道)에 가까와 마음을 쓰는데 순진(純眞)하였으니 세상(世上)에서 공자의 문인(門人)에 안씨(顔氏)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어찌 많은 것을 바라겠는가?
선생(先生)이 세상(世上)을 떠난 뒤에 사림(士林)에서는 그의 덕(德)을 숭상(崇尙)하려고 하여서 분강(汾江)과 타양(陀陽)의 서원(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묘당(廟堂)에는 영원(永園)토록 선생에게 제사(祭祀)를 올리니 어떤인들 슬플 것인가?
자손(字孫)들은 여러 대대로 이어져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고향(古鄕)에 살아가는 것인데 십수대(十數代)이며 사백여년(四百餘年)이나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라. 세태(世態)의 변천(變遷)으로 북쪽 강(江)을 건너서 수리(數里)쯤 형호리(衡湖里/저우리 광덕)에 옮겨 살고 있는데 행사(行事)가 있을 때에는 서로 돕고 힘을 모아 함께 하는 의리(義理)는 같이 살아가며 단합(團合)하고 모이는 그런 것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이산(離散)해서 찾는 한(恨)스러운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곧 파산등(巴山嶝)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그것으로써 추모(追慕)의 목적(目的)에 부쳤으니 머리쪽 언덕에는 잊지못할 후손(後孫)의 정성(精誠)일 것이니라. 하몰며 그 땅에는 또 이것이 선생(先生)의 생가(生家) 백씨(伯氏)인 모하당공 선생 기적비(慕河堂公先生紀積碑)의 곁일 것이니라. 생전(生前)에 흡족(洽足)하지 못했으나 화용(華容)에 미치는 인연(因緣)이며, 다시 땅 위에서 이어지는 계기(契機)일 것이야, 선생(先生)의 음덕(蔭德)이 흐른다는데 의심(疑心)하지 않는다.
아들의 휘(諱)는 학룔(學龍), 경룡(慶龍),종룡(從龍)이며 손자(孫子)의 휘(諱)는 담(담), 현(현), 체(체),급(급),제(제), 괴(괴), 하(하), 전(전)이 있으며 모두 유학을 하였다. 구세손(九世孫) 휘(諱)는 희춘(희春)으로서 선생(先生)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하였다.
십세손(十世孫) 휘(諱)는 만조(萬祚)로서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다. 십오세(十五世) 창손은 시웅(時雄)이며 나머지는 모두 수백인(數百人)이라 모두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하루는 예손(裔孫)도창(道暢), 동걸(東杰)씨가 하회(河回)마을의 집에 나를 찾아와서 비문(碑文)을 청(請)하였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 글을 못하는 것이라고, 감히 감당(勘當)하지 못한다고 부치고 그것에 두세번씩이나 사양(辭讓)한 것이다. 제씨(弟氏)들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사적(事跡)을 다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내가 그와 같은 뜻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을 맡아서 부지런함이 나으리라 하였다. 그것에 내가 선생(先生)의 마음을 우르러 사모(思慕)하는데 남에게 뒤지지 않으리라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모하공(慕河公)의 기적비문(紀積碑文)을 지었는데 중첩(重疊)함에 있어서 의심(疑心) 적다고 하더라도 옹졸(壅拙)함을 잊고서 위에 서술(敍述)하였다. 그렇다고 어찌 감히 말하랴?
선생(先生)의 그윽한 덕(德)을 밝히는 데 만(萬)의 하나라도 이를 것인가?
새기는 말에서
삼가 선생(先生)을 생각하건데 하회(河回)마을에서 대대로 문벌(門閥)일세 도에 가까운 자태(姿態)는 순박(淳朴)하고 정허(靜虛)한 자질(資質)이네 등림(鄧林)의 좋은 재목(材木)으로 도산(陶山)의 많은 제자(弟子)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弟子)이네 뜻밖으로 누(累)를 끼칠 것이 없고 성학(成學)에 잠심(潛心)하였네 걸어 다녀도 현인(賢人)이 있으므로 도의(道義)로 매우 즐거웠네 스스로 하나의 집안을 이루었으니 문중(門中)이 빛나고 있네 순수(純粹)한 덕행(德行)으로 진실(眞實)하게 일했지만 중도(中途)에서 원통(寃痛)하게 요절(夭折)하였네 공자(孔子)의 문인(門人)에 안씨(顔氏)라고 칭송(稱頌)했으니 세상(世上)의 여론(輿論)에서도 의심(疑心)하지 않았네 이는 하회(河回)마을의 화목(和睦)으로 향기(香氣)가 넘치어 그치지를 않았네 하나의 물가와 하나의 언덕에도 옛자취가 아닌 것이 없네 자손(子孫)들 대대로 살면서 가업(家業)을 이어받았네 세태(世態)의 변천(變遷)이 있어서 광덕리(廣德里)에 옮겨 살고 있네 옛터는 쓸쓸한 모양이나 푸른 자연(自然)은 옛빛깔 그대로이네 먼 조상(祖上)을 사모(思慕)하면서 두루 돌아다니는 것도 절실(切實)한데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네 땅은 파산(巴山)에 점유(点有)하였으니 백씨(伯氏) 모하당공(慕河堂公)의 곁이네 살아서 다하지 못한 인연(因緣)인데 땅위에서 다시 이어지네
해는 갑신(甲申 ,2004年) 늦가을 후학 방예손 단하 삼가 지음
◆참고자료: 풍류회지 14호/ 柳啓榮님이 올린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 2006. 1. 23 류현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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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문하의 안연: 파산 류중엄 선생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인으로 추앙받는 안연[본명:안회顔回]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였다.
안연은 스승의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예와 인을 중시하였으며 덕행이 뛰어난 현자로 널리 존경받았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음에도 그 어려움을 안빈낙도의 심법으로 잘 극복하였으며 이는
스승으로부터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가난에 의해 몹시 병약하여 30세를 갓 넘겨 요절하고 말았다.
공자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안연은 비록 젋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후세에 이르도록 공자의 首제자로 인식되며 추앙받았다.
우리나라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문하에도 안연과 같은 퇴계의 제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파산 류중엄[1538~1571}으로 자는 경문景文,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巴山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파산 류중엄은 류공석의 아들이며, 겸암 류운룡[1539~1601], 서애 류성룡[1542~1607] 형제의
(5촌) 從叔인데다가 퇴계이황선생의 스승인 농암 이현보의 曾孫壻(손자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1538년생으로 자신과 연령대가 비슷한 從姪(5촌 조카)인 겸암 형제와 함께 퇴계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고 서로 학문에 대한 토론을 자주 하였다.
또한 스승 퇴계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서신에 담아 30여회에 걸쳐 주고 받았고 황준량 공이 성주목사로 재임할 적에 오건 선생과 함께 주희 선생의 성리서를 서로 강론하기도 하였다.
파산은 문장과 행의가 고명하여 일찍이 스승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지만 선생이 별세 한 후
1년이 채 안되어 34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과 그를 아꼈던 모든 사람들은 파산을 일컫어 '퇴계문하의 안연'이라고
하며 그의 재능과 학문을 애석히 여겼다.
저서로는 파산일고巴山逸稿가 있으며 그의 학문과 덕행을 숭모하는
유림에서는 불천위로 제정하여 지금까지도 해마다 그의 후손들이 불천위를 지내고 있다.
2006. 6. 19 류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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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류중엄 (巴山 柳仲淹) 불천위제사 (12월 25일, 비위 4월 8일)
신주면 고위; 현 선조 고 파산 처사 부군 신주 顯先祖考巴山處士府君神主
배위: 영천이씨 진사 휘 원승元承公 (농암 이현보 손자)의 따님
신주면 : 현 선조 비 유인 영천 이씨 신주 顯先祖비孺人永川李氏神主
묘; 서후면 증동 합폄
안동 분강서원, 타양서원에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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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柳仲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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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은 자가 희범인데 처음의 자는 경문이었다.
호는 파산, 본관은 풍산이며 안동에 살았다.
가정 무술년(1538)에 태어났으며 선생의 문하에 와서 노닐었다.
선생이 황금계(황준량 ;1517-1563/ 퇴계문인,문과, 단양군수 성주목사/파산의 처고모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류희범은 지향하는 뜻과 식견이 참으로 아름답다" 라고 하셨고
또 "희범이 순수하고 고요한 것이 참으로 기쁘다"라고 하셨다.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31세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탄식함)라는
일컬음이 있었으니 34세에 작고하였다.
*파산 류중엄; 퇴계학연구 17집- 퇴계선생 제자전기 3 ,1997, 경상북도, 16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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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양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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