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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풍산류씨 가학연원家學淵源 5-파산 류중엄

회기로 2010. 1. 2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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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

성명 : 류중엄(柳仲淹)  (1538년 ~ 1571년)

본관 : 풍산 (豊山)

자 :    경문 (景文)

출신지 : 안동(安東)

분묘지 : 안동(安東) 천등산(天燈山) 능골 금계재사 숭실재

과거를 사양하다:

많은 선비들과 과거장에 임하였을 때 모두들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오늘의 장원은 이 사람

(류중엄)일 것이다.” 하므로 이를 듣고 드디어 글 지은 것을 제출하지 않고 과장에서 나왔다.

조 : 류자온(柳子溫)

생부 : 류공석(柳公奭)

양부 : 류공계(柳公季)

모 :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딸

형제 : 모하당 류중청(柳仲淸)

지극한 효성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약관에 생가의 모친상을 당하여 일 년 복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으려고 하자 퇴계 이황이 “선왕이 제정한 예를 어길 수 없다.”하므로 드디어 상복을 벗었다.

학파 : 퇴계 학파

스승 : 이황(李滉)

향사 : 타양서원(陀陽書院/일직 조탑리; 손홍량, 김자수, 류중엄),

         분강서원(汾江書院/농암 이현보, 금계 황준량, 파산 류중엄)

퇴계 문하의 안자(顔子)

선배들이 그를 두고 남치리(南致利)와 더불어 천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하므로 공자 문하의 안자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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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柳仲淹, 1538~1571)

류중엄의 자는 경문(景文)·희범(希范), 호는 파산(巴山),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참봉(參奉) 공석(公奭)이며, 어머니는 안동권씨로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스승의 뜻에 따라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퇴계의 도학(道學)에 깊이 심취하여 구절마다 스승의 학문을 찬미하고 흠모하였다.

그의 글 중 「유청량산운(遊淸凉山韻)」은 청량산에 들어가 지난날 스승의 노닐던 자취를

더듬으며 스승의 덕행을 흠모한 것이다.

 

이황과 주고받은 서찰 30여 통을 수록한「사문수찰(師門手札)」에는 경전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수신제가의 방법과 상례 등 예절에 대하여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그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도 학문과 덕행이 남달라 당시의 공론에 의해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1543∼1580)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라고 일컬어졌다.

숙질 관계가 되며, 동시에 도산에 가서 동문수학한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 1539∼1601)과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 두 형제 이외에도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1517∼1563 처고모부)과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과 친밀하게 교유하였다.

황준량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오건과 함께 주희(朱熹)의 성리서(性理書)를

서로 강론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안동의 타양서원(陀陽書院),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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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1538, 중종33~1571, 선조4)
자는 경문(景文) 뒤에 희범(希范)으로 고쳤다. 호는 파산(巴山).

참봉 공석(公奭)의 아들로 숙부인 공계(公季)에게 출계하였는데

겸암과 서애의 종숙부(從叔父)가 된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자인 이원승의 사위이며 퇴계의 처이질서(妻姨姪壻)다.

단아하고 청순한 인품이 향리에 널리 알려졌다.

 

일찍부터 명리에 초연하여 위기 실천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퇴계 문하에 나아가 더욱

그 뜻을 굳혔다. 1564년 종형(從兄)인 입암(立巖)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겸암과 서애 형제와 함께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몇 달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학문과 도덕으로 세상에 크게 쓰일 인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 해인 선조4년에 12월 25일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동문수학한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고 칭하며 애석해 했다.

 

분강서원(汾江書院, 농암 이현보 선생을 배향한 서원)과 타양서원에 제향되었고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남긴 글은 거의 난리에 유실되었고 몇 편의 글이 『파산일고(巴山逸稿)』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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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중엄(柳仲淹):1538(중종 33, 무술)∼1571(선조 4, 신미). 본관 豐山.

                          자는 景文•希范. 호는 巴山. 公奭의 子.

                          이황 문인.제향:陀陽書院•汾江書院.

                         유고 약간 편이 『巴山逸稿』에 전함.

                          ▣참고:「行蹟」(柳元之 撰) 󰋫집필:김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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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계 선생의 편지 
  • 1. 류희범에게 답함

    알려 주신 바 심중(心中)의 잡초가 너무 많다 함은 올해에는 여러 이의 분분(紛紛)함에
  • 따르지 않을 수 없었던 까닭이었으나 여기까지 이르러서는 그 일을 또 그만둘 수도 없는 일이옵니다. 그러니 마땅히 다시 더욱 힘을 쓰는 것이 친우의 바라는 바에 부응할 가장 좋은 일입니다. 그동안 날마다 때때로 의리(義理)를 자세히 살피어서 가슴속에 깊이 배도록 하려는 의사(意思)만을 끊지 않음이 좋을 것입니다.

    2. 류희범에게 답함

    착한 이를 사당을 지어서 제사하는 일은 예문(禮文)에 대해 각자 지껄일 뿐만 아니라, 자기는 하나도 착한 일을 하지 못하면서 남을 책망하는 데는 반드시 구비하기를 바라는 것이 인심이라 번번이 이 같으니 참으로 우스꽝스럽고 민망스러운 일입니다. 한꺼번에 따로 제사하는 일은 예전에도 많이 있었는데 저 이는 아직도 자기의 편견을 고집하니 그의 미혹을 어찌 깨뜨릴 수 있겠습니까?

    3. 류희범에게 답함

    선비의 풍기(風紀)가 무너짐에 큰 변이 일어나서 세자(世子)가 죽었으며 또 이런 시대를 만났으니 세상 일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으며 국가의 장래가 염려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자강(吳子强:덕계德溪 오건)이 약속한 기일을 지난 뒤에 갔기 때문에 서로 만나지 못할까 염려하였는데 지금 만났음을 알게 되니 참 다행한 일입니다. 자강(予强)은 타고난 성품이 순박하며 학문에 힘씀이 또 매우 지성스러우니 진실로 도움이 되는 친구라 할 것입니다.

    그가 멀리 온 뜻이 쉬운 일이 아닌데 내 자신이 득력(得力)이 없어 그 소망에 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반 개월 동안 주서(朱書)를 다 읽고 그 여가에 『심경(心經)』과 『근사록(近思錄)』을 질문하는 등 총총한 일과로 인해 정밀한 연구와 궁극의 생각이며 체험과 실천을 행할 여가를 얻지 못하였으니 주자(朱子)의 독서법 중 대금(大禁)을 범한 것은 좋지 못한 일입니다.

    귀하가 전날 금계(錦溪 황준량)와 더불어 논한 것 중 의문되는 점을 낱낱이 기록한 것을 받아 보니 그 내용이 새 뜻을 발명한 듯합니다. 곧 이미 알고 있는 학설에 고집하지 않고 문득 전자(前者)의 그름을 깨닫고 서로 믿으며 이해함이 이와 같으니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 그러니 나의 학설도 그릇된 점이 있으면 구차히 따르지 않을 것이므로 나에게 유익함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 그 후에 또 정구(한강 정구)라는 이가 와서 하루를 머물다 갔는데 매우 영민하나 다만 그 영민한 것이 도리어 병통이 될까 걱정됩니다.

    나는 요사이 홀로 산사(山舍)에 거처하여 『심경』을 조용히 공부하며 이제까지 배운 것이 차근하지 못하여 정밀하게 알지 못하고 있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한갓 배웠다는 이름을 얻고서 실지의 고우가 이 같았는데 성현(聖賢)의 역에 가까움을 조금 깨달았으나, 이같이 늙고 병들었기에 전날의 부족한 점을 보전(補塡)하기 어려우니 매우 걱정됩니다.

    늘 생각해 보면 우리 동류(同類) 중에서 성질이 도(道)에 가깝고 뜻이 독실하기가 귀하 같은 이가 한 두 사람 있기도 쉽지 않은데, 더구나 과거(科擧)에 정신을 써서 이에 전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고 전력을 다하지 않으니 편지에 말씀한 ‘부지불각간(不知不覺間)’에 여전히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예사일 것입니다.
  • 지금 만약 병통이 무엇인가를 알고자 하면 또 말씀하신 대로 밖으로 향할 의사는 많고 바로 병통을 근절시키려 함에 걱정할 것이니, 딴 데 마음을 빼앗기면 정밀에 전력함과 정신통일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금계(錦溪)의 장사(葬事)는 구애되는 것이 많아서 너무 늦어지니 이것이 친구들의 수치라 아무쪼록 힘껏 주선하여 때를 놓치지 말도록 하는 것이 또한 한갓 좋은 일일 것입니다.

  • 5. 류희범에게 답함 1564년

    전날 한나절의 만남은 한갓 작별 후의 회포만을 더할 뿐이었더니, 중이 오메 편지를 받으니 궁금증이 풀어집니다. 한재(旱灾)가 혹심하여 어제 현감(縣監)이 기우제를 지냈는데 겨우 이슬비가 조금 내리고 이내 햇빛이 발끈 나므로 모든 사람이 근심을 걷잡을 수 없게 되니 어찌할 것인지? 산이 타고 샘이 말랐으리라고 짐작하였더니 편지를 받아보니 과연 그렇군요.

    언행록(言行錄)에 왕차옹(王次翁)1)이 무목(武穆)2)을 무고(誣告)했다는 말을 기록한 것을 보내 와 읽어 보니 잘 되었습니다. 그러나 무목은 천품(天稟)이 충의(忠義)가 천고에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 뜻을 세우고 행의로써 임금을 섬김에 도리에 합당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자고로 소인(小人)들이 충성스럽고 착한 사람을 모함하였는데 없는 일을 있는 것 같이 하여 충신을 역적으로 만들었으니, 그 술책이 모두 차옹의 계책이었습니다. 주자(朱子)가 차옹이 역적에게 아부하여 착한 이를 무고하며 하늘을 속이고 나라를 망하게 한 죄를 밝게 말씀하였으며, 따라서 무목이 간사한 사람들의 교묘한 무고를 당함이 이와 같아서 모면할 길이 없는 원통함을 알게 된 것입니다.

    나의 의견이 이 같으나 귀하는 어떻게 해석할는지요.

  • 6. 류희범에게 답함

    오랫동안 소식이 막혔더니 홀연히 장서를 받아 말씀한 뜻을 잘 알았으며, 귀를 열어 주심이 많으니 매우 고맙고 또 다행한 일입니다. 나는 계상(溪上)에 우거(寓居)하며 큰 병은 없으나 다만 늘그막에 곁에서 보인(輔仁)할 친구조차 없으니 보내 온 말씀보다 더 쓸쓸하여 걱정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늘 생각에 그대 같은 벗이 있는데 각자가 사고로 인해 항상 같이 학문을 닦는 힘을 얻지 못하게 됨이 한스럽습니다. 또 그대의 소처(所處)를 상상하면 본 의사를 깨뜨린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어찌 배겨나는지. 이것은 마땅히 형편에 따라 선처하여, 덕을 스스로 잃지 말고 또 남에게 원성을 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덕을 기르고 학문에 진취하는 한갓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 전에 말씀한 강상(江上)에 지으려던 정사(精舍)는 아직 이룩하지 못한 것은 고상한 회포에 상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급속히 서두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이니 마땅히 형편에 따라 종용히 이룩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서울에 가는 것은 시속(時俗)에 흔들린 것 같긴 하나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본시 하는 수없이 진력할 것이나 과거(科擧)를 하고 못함은 하늘에 맡길 일이니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책문(策文)3)의 글제는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라 이곳 여러 사람들도 알려고 하는 이가 간혹 있으나 모두 응답해 주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고 한스럽습니다.

    종씨(從氏-四寸 입암 류중영)의 감사(監司-황해도) 임명도 가히 축하할 일인데, 이현(而見:서애西厓)이 또 뛰어난 재주로 앞길을 열게 되었으며 그 사람들 형제의 취지(趣旨)가 매우 고상하니 가상한 일입니다.
  • 친구 간에도 서로 경사로 여기거늘 하물며 그대는 어떻겠습니까!  다만 이현의 장인(丈人:현감 이경李坰-세종 5子 광평대군 5대손)이 불의에 세상을 떠났으니 놀랍고 통곡할 일입니다.

    김사순(金士純:학봉) 삼형제가 모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음은 참으로 보내온 편지와 같습니다. 마침 우성전(禹性專)4)이 이중립(李中立))5)과 함께 찾아와서 유숙(留宿)하고 일찍 돌아갈려 하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등불을 켜고 이 편지를 씁니다.

    하지만 눈은 어둡고 붓은 달아 글씨가 제대로 써지지 않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며 별지(別紙))6)를 조목에 달아서 답할 여가가 없으므로 훗날로 미루오니 그렇게 알면 고맙겠습니다.

  • 7. 류희범에게 답함

    보내 온 편지를 받아 근간 학업을 닦는 몸 평안함을 알게 되니 그립던 마음이 위안 되나이다. 나는 요사이 이 집에 돌아와서 있으나 여러 가지로 마음이 수수하더니 이제 다행히 성은을 입어 무거운 짐을 벗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자헌계자(資憲階資)7)인 지중추(知中樞)8)의 감투는 아직도 여전히 벗지 못하니, 이것이 어찌 초야(草野)의 몸에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다만 너무 번거롭게 사직서를 올리기 어려워서 정신이 어리둥절한데, 몇몇 재상들은 혹은 편지로서 혹은 인편으로 부임하지 않는다고 꾸지람을 하니 마음이 더욱 편치 못합니다.

    보내신 편지에서 병을 요양하는 외에는 다른 걱정은 없을 것이라고 하나 나의 사정을 자세히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전에 산에 거처할 때 위장이 항상 불편하였는데 단오에 성묘를 갔다가 계상에 들어와 드디어 이곳에 머물러 조리하며 밖에 나오지 않으니, 산사(山舍)의 뜰은 고요하고 풀이 우거졌습니다. 고요한 곳에서 상종(相從)하는 것이 고소원(固所願)이나 지금은 두 사람이 모두 그럴 때가 못 되니 어찌할 수 없지요.

    여러 가지 묻는 말씀은 모두 나의 우매한 소견으로는 만에 하나도 능하지 못하는 것이며 졸지에는 더욱이 망령된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아직 훗날로 미루오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전날 해주(海州)에서 인쇄한 주서(朱書)를 보내주니 그것을 받아 교정 중인데 제7책은 오착(誤錯)된 곳이 특히 많아 모두 손을 대어 고쳤습니다. 그렇게 고친 부분에 모두 표지(標識)를 붙였으니 만약 같은 책이 또 있으면 표지에 따라서 개정하는 것이 손쉬울 것입니다.

    그러나 첫 권은 작년 겨울에 교정을 마쳤는데 출타했다가 와서 찾으니 눈에 띄지 않는군요. 혹 어느 친구가 빌려갔으리라 짐작되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로써 영영 잃어버릴까 염려되오며 가석(可惜)한 일입니다.

    이득(而得:겸암선생 字,응현應見)은 지금 어디 있으며 이제는 신양(身恙)이 완쾌되었는지요? 상면(相面)할 날짜를 기필할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더위가 닥쳐오는 때이니 몸을 귀중히 가지시기 천만(千萬) 바랍니다.

  • 8. 류희범과 이현(而見-서애선생 字)

    전에 황해도에 갔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제 편지를 받고 벌써 서울에 돌아오신 줄 알게 되니 마음이 위안됩니다. 늙은 나는 봄에 큰 병을 치르고 나서 기혈이 몹시 줄었는데 또 마침 왕의 부름을 받았으니 여러 번 사양할 말이 없어 힘들게나마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번 올라갈 계획입니다. 그러나 이 같은 혹서에 능히 생명을 보전해서 성문을 들어설 수 있을는지요. 남들이 모두 나를 위해 위태롭다고 하며 또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걱정이 되니 어찌할까요?

    보내 온 증주(增註)의 인본(印本)을 받아 보고 양군(兩軍)이 의심나는 곳에 표지(標識)를 붙인 것도 또 모두 알았습니다. 그중에서도 크게 깨닫지 못할 일이 있으니 내가 당초에 이 절요(切要)9)를 초(抄)할 때는 본래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계획이었습니다.

    황중거(黃仲擧:금계 황준량)가 굳이 그것을 가지고 가서 인쇄하여 반포까지 하였으므로 죄송스럽기 그지없는데 뜻밖에 중거(仲擧)가 또 이같이 가당치 않게 치켜세우는군요.
  • 이것을 볼 때마다 늘 황공하여 스스로 용납할 수 없었는데, 해주와 평양에서 인쇄한 것은 모두 활자(活字)를 쓰고 판은 곧 해판(解版)10)이었으므로 고치라고 청할 나위도 없었습니다.
  • 그래서 남부끄럽고 황공할 뿐이었으나 이번에는 판각(板刻)이어서 고칠 수 있으므로 앞서 이미 간청을 했었습니다.

    내 생각에는 서로 아는 터이니 으레 안 들어주지는 않으리라고 믿었는데 지금 보내온 것을 보니 끝내 들어주지 않아서 이 못난 사람으로서 영구토록 후세에 죄를 지은 것이 되었습니다. 놀랍고 한스러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 바라건대 곧 웃어른(감사공)에게 아뢰어 그 말을 빼 버리고 그 판을 고쳐 새겨서 큰 죄를 면케 해 주십시오. 만약 끝끝내 믿어 주시지 않는다면 어찌 다시 얼굴을 대할 수 있겠습니까?

    부디 체면상 하는 말이라 여기지 말고 속히 요청에 의하여 단행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목록은 이런 이유로 보내 드리지 않으니 양해해 주시기 바라며 이만 그치나이다.

  • 9. 류희범에게 답함

    청주 사람이 오는 편에 보내 주신 편지를 받아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이곳 사람들이 모두들 공이 경서에 대한 연구가 정밀하고 익숙하니, 이번 과거에 급제하기가 땅바닥의 지푸라기를 줍는 것처럼 쉬울 사람은 반드시 아무개일 것이라 하였습니다.
  •  나 역시 남들이 하는 말처럼 그러할 것이라 여겼으나 급제를 못했으되, 그것은 오로지 하늘에 달려 있고 또 때가 있는 것이니 공에게 무슨 가감이 있겠습니까?

    나는 치사(致仕)의 소를 올리고 집에 돌아온 뒤에 뜻밖에 왕의 부름을 받았으니 이런 낭패가 없습니다. 그러나 다만 마땅히 뜻을 이룩할 날이 있을 것이니 별 심려할 일이 아니옵니다. 벼슬을 하고 안하는 일은 반드시 물을 까닭도 없지만 다른 탈이 날 기틀이 있고 없음을 어찌 요량(料量)할 수 있겠습니까? 영락(零落)되는 친구들의 한탄은 원래 있는 것이나, 바람머리에 서는 것이 자고로 어려운 일이니 무엇이 괴이쩍겠습니까?

    오직 스스로 몸을 단속할 일이니 나 자신도 이렇게 해볼까 하는 것이며 스스로 타락하지 않음이 제일일 것입니다. 말이 많음은 도(道)에 해로운 것이기에 이만 그치겠으나 오직 몸을 귀중히 여기기 바랍니다.

  • 별지(別紙)

    이전 편지에 내 배움이 정착이 없다고 했는데, 성현이 말씀한바 마음을 다스리고 행신을 할 중요함을 철두철미하게 종신토록 행해야 할 것을 듣고자 하니 이 물음이 매우 절실한 것입니다. 내가 늙고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자신이 덕에 들어가는 길도 알지 못하는데 어지 공을 위하여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평생에 배우고자 하면서 능치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논어』에는 공자(孔子)의 문인들이 배움을 논함에 철두철미한 말이 아닌 것이 없는데, 그중에서도 번지(樊遲)가 인(仁)을 묻자 공자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거처에 공손하고 일을 행함에 공경하며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진실하고 정성을 다하는 등은 비록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다.”

    또 그의 물음에 답하여 “일을 먼저 하고 소득(所得)을 뒤로 하는 것이 덕을 숭상하는 일이며, 자기의 악을 다스리고 남의 악을 책망하지 않는 것이 자기에게 숨어 있는 악을 뿌리 뽑는 것이며, 잠시의 분(忿)으로 제 몸을 잊어 어버이에게 욕이 미치도록 하는 것이 미혹된 일이 아니겠는가?”라 하셨습니다.

    이 두 가지가 가장 간절한 말씀이니, 이것을 미루어 깊이 생각한다면 무궁한 의미가 있는 것이요 또 무한한 사업일 것입니다. 다시 나의 엉성하고 아둔한 자질을 깨닫고 이것을 고치려는 약(藥)으로 삼아 여기에 힘써 왔으나 오래되어도 득력(得力)을 못하여 항상 스스로 한탄하는 바입니다. 공이 자신이 아는 것을 버리고 물어옴으로 말미암아 감히 숨길 수 없는 일이며, 조금이나마 생각을 이루고 행함에 힘쓰는 기본적 도움이 있을 것이니 서로 힘써 행하면 다행할 일입니다.

    “모수(母數)를 더한다, 자수(子數)를 더한다.” 하는 말은 「명시책편(明蓍策編)」11) 첫 장에 있으니 대연(大衍)의 수가 50이라 하였고 그 주(注)에 “사상(四象)12)이 1·2·3·4의 자리를 차지하였고 각각 그의 남은 것으로 수를 삼는다.”고 하였으니 대개 수는 10에 불과한 것이다.

    태양(太陽)이 제1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9가 곧 수인 것이고, 소음(少陰)이 2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8이 곧 수인 것이며, 소양(少陽)이 3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7이 곧 수인 것이고, 태음(太陰)이 4위를 차지하고 나머지 6이 곧 수인 것이니, 각기 그 부류로써 밖에서 교착(交錯)하는 것이다. 태음의 수가 태양의 자리 밖에 있고 태양의 수가 같으니 이것이 이른바 부류로써 교착한다는 것입니다.

    주자(朱子)의 말씀에 “양(陽)은 가히 바꿀 수 없고 음(陰)은 바꿀 수 있다.”고 했으니, 이것은 생(生)하는 수를 위주로 해서 말한 것이기 때문에 “북과 동과 중(中)이 양이 되고 남과 서가 음이 된다.”고 하였으며 옥재호(玉齋胡)가 이 구절을 해석하는데 역시 주자설(朱子說)과 같았습니다.

    옥재호가 나누어지고 합해지며 채워지고 비워지는 것을 논하여 “음은 정(靜)을 위주로 하므로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 있고 양은 움직임을 위주로 하므로 변동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성수(成數)를 위주로 하여 말한 것이다. 때문에 “북과 동이 음이 되고 서와 남이 양(陽)이 된다.”고 하여 주자설과 서로 다르니 요컨대 양설(兩說)이 병행되어 그 뜻이 갖추어진 것입니다.

    『논어』의 주(註)에 “숨이 아직 있는 동안”이라 한 것에 대해 보여 주신 해석은 내가 앞서 들은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증자(增子)가 “죽은 뒤에야 말 것이라” 한 것을 주자가 “곧 죽게 될 즈음 숨이 아직 끊어지기 전에는 이 뜻을 잠깐 동안이라도 게을리 함을 용납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으니, 이 같음이 바야흐로 죽은 후에야 말 것이라는 뜻이 부합되고 친절하며 평시에 잠시라도 간단없다는 뜻이 포함된 것입니다.

    만약 보내 온 말과 같다면 비록 평일에 간단되는 친절함이 없는 것이기에 집주(集註)의 정밀한 법과는 같지 못한 것입니다.

    군신예장(君臣禮葬)이라 함은 『주례(周禮)』에 “무릇 벼슬 있는 이의 초상을 직상(職喪)”이라 하니 국상(國喪)의 예(禮)로서 그 금령(禁令)에 따라 그 일에 순서가 있는 것이다. 『맹자』에서 공행자(公行子)13)가 아들의 초상을 당했다는 주(註)에 임금의 명령으로 조문을 간 까닭에 조정이라고 한다 하였다.

    또 『예기(禮記)』에 “임금이 신하의 초상을 치르고 장사 지내는 것을 군신예장(君臣禮葬)이라 한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임금을 “임금의 예에 쫒아 장사 지낸다.”고 한다면 공자가 이 일에 이것을 들어서 다시 말씀하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 류중엄, 『파산선생일고』
  • http://www.ugyo.net/index.jsp?cat=tu_psn&url=/tu/psn/psnd_life.jsp?cat=tu_psn&psncode=KSAC_yman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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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문 
  • '발문', '跋文', '위는 종선조(從先祖) 파산 선생의 일고(逸稿)이다. 시, 편지, 유묵(遺墨)과 스승의 편지, 후현들의 말씀 등 모두 몇 장이 된다. 무릇 선생은 순진하고 침착하며 깨끗한 자질로 당내의 입암(立巖)·귀촌(龜村)·겸암(謙菴)·서애(西厓) 여러 선조와 더불어 공부에 열심이었다.

    책 상자를 지고 도산 이 선생의 문하에 가서 배우기를 청하였는데 학문에 뜻이 독실하여 칭찬을 많이 들었다. 모든 사람들이 믿음 있는 붓으로 비지 남치리와 함께 대현의 역(域)에 거의 도달했다 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이 세상을 떠나 큰 사업을 이룩하지 못하였다. 또한 가정도 가난하고 화재가 나 문헌(文獻)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좋은 말씀과 착한 행의와 찬란한 문필이 후세에 전하지 못하게 되어 사문(斯文)이 애석해하며 통탄함이 그지없었다. 그러다 우리 백부와 선친 외재(畏齋 류종춘)1)가 비로소 예안의 고가(故家)에서 시와 편지 등을 찾아 모았는데 100분의 1도 못 됨으로 퇴계 선생과 주고받은 시 원운과 편지 등을 함께 모아서 드디어 일고(逸稿) 한 권이 이루어졌다.

    이것을 임여재(臨汝齋 柳규)·월오헌(月梧軒 柳一春)·유하(柳下 柳象春) 여러분들이 전후해서 교정하였으나 간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전 문중 족친들이 슬퍼하여 수의(酬議)해서 자금을 모으고 힘을 뭉쳐 일고 발간을 도모하였다.

    1834년(순조 34) 가을에 서애집을 중간하여 일을 마치자 모두들 “선생의 원고가 상자 안에 묶여 있음을 어찌할 수 없으니 잇따라 이룩해서 선대 어른들의 뜻을 완수하자.”고 하여 10여 일 만에 일을 끝마쳤다.

    이 일을 앞장서서 도모한 이는 전 병조판서 유상조(柳相祚)이고, 간역(刊役)에 주간한 이는 참의령감(參議令監) 유치목(柳致睦)과 본손 희춘(羲春) 씨이다.

    아! 퇴계 선생 문하에 든 이가 우리 집에서 세 분인데, 마침 이 해에 겸암 할아버지에게 문경(文敬)이라는 아름다운 시호가 내리고 서애 할아버지의 문집을 중간(重刊)하였으며, 선생의 일고가 세상에 함께 나오게 되었으니 우연한 일이 아닌 것이다.
  • 이 책을 읽는 이는 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실적과 높은 덕을 밝혀서 옛 군자에 생광(生光)이 나게 할 수 있을는지? 사사로이 두 손을 모으고 기다리는 바이다.

    방후손(傍後孫) 이좌(台左-학서) 삼가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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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문 
  • '祭文', '1607년(선조 40) 윤6월 25일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안동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안동진 병마첨절제사(兵馬僉節制使)에 재직 중인 정구(한강)는 삼가 유학 장흥효(張興孝)1)를 보내 작고한 친구 처사 유희범의 묘에서 밝게 고하노라.

    아! 공의 깨끗한 품행과 침착한 자질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물었으며, 나의 경박한 성질에는 더욱 마땅히 본보기가 될 만하므로 상종(相從)하여 부지런히 배우고 덕을 닦음에 있어 가장 존경하는 친구로 대하였다.

    평생에 기대가 보통이 아니었으며 훗날의 원대한 뜻 가지심은 본시 하류 친구들은 알 수 없는 바라 하였다. 그런데 어찌 하늘이 수(壽)를 허락지 않아 공으로 하여금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게 하여, 생존해 있는 친구들에게 무궁한 슬픔을 품게 하는고!

    내가 이 고을에 오던 날부터 곧 무덤을 찾아뵙고자 했으나 병이 몸을 떠나지 않으므로 오랫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다. 이제 다시 위중한 증세가 생겨 집으로 돌아갈 일정이 총총한 탓에 사람을 보내 대신 술잔을 올릴 수밖에 없으니, 바람 따라 일어나는 슬픈 회포와 면괴한 정을 참을 수가 없도다.

    상상하건대 오직 영명(英明)하신 영혼은 나의 이 안타까운 회포를 살펴 주시리라.
  •           상향(尙饗).

                                - 정구(鄭逑)

  • 제문
  • '祭文', '살아서는 현명하신 임금의 뜻을 돕지 못하였으니, 죽어서는 옥황상제의 칙지(勅旨)를 초(草)할 것이다. 재주의 꽃다움은 수많은 영걸보다 뛰어났고, 문필의 힘은 가히 천근(千斤)을 들 수도 있었다.
  • 지난날에 공이 나와 서로 좋아한 것은 학문에 독실해서였으니 인륜을 밝히길 기약했네. 그 사귐은 난초(蘭草)의 향을 풍기고 쇠를 끊을 만큼 마음이 합치했으며 그 뜻은 학업을 정밀히 하고 덕은 순수함이었지요. 몇 번이나 같이 책 상자를 지고 도산에 갔으며, 몇 번이나 과장(科場)에서 포부를 털었던가?

    몸은 모두 초야(草野)에 떨어졌으되 꿈은 함께 하늘가에 이르렀네. 거울 보는 것 같은 사업에 힘썼고 수레 달리는 듯한 광음(光陰)도 아끼었다. 고이 선을 인도함에는 장님의 거수(擧手) 같았고 나의 결점을 꾸짖음은 의사가 병자를 고치려 하는 것 같았다.
  • 아! 시운(時運)이 형통하지 못하여 어찌 운명이 그다지도 꽉 막혀 버렸는지. 용검(龍劍)1)을 품고 한번 써 보지도 못하였고 굽은 자벌레가 펴 보지도 못하였네. 벌써부터 반가이 대하던 즐거움이 어찌 백발이 되어 새롭다 할 것인가? 각각 흉중(胸中)에 불평이 있고 또 지조의 높음이 있었네.

    10년이란 세월 동안 공경하는 마음으로 믿어 인(仁)을 돕는 데 삼익(三益)의 벗임을 바랐더니, 어찌 요량하였을까? 병세가 골수(骨髓)에 침입하여 음성과 용모가 멀어진 슬픔이 있을 줄이야. 사방으로 불러도 혼적이 없어, 일신을 돌아보니 동류(同類)를 잃었네.

    아! 슬프다 나의 친우시여 영영토록 사생의 갈림을 통곡합니다. 공의 관(棺)을 생각하니 차마 볼 수 없는 일이라. 알지 못하겠네, 어느 세상에서 그대의 음성을 다시 듣겠는고. 지붕 위에 달이 지는가 싶어 강동(江東)의 석양 구름을 슬퍼하는데, 저승의 외로운 혼을 마음 아프게 여기며 인간세상에서 그대가 끼친 향기를 잡아 보노라. 한잔 술을 멀리 보내 신(神)을 부름에 소박한 정으로 은근히 고하나이다.

                       - 권호문(權好文-송암)

  • 만사
  • '輓詞', '상계(上溪)의 선생님을 찾아가 강당에서 강습할 때 만났네.

    선생님이 후학을 가르치려 하시자 때 마침 공은 선배를 사모하네.

    명(命)이 짧으니 못 믿을손 하늘이여 대량(大樑)이 무너졌으니1) 도(道) 찾을 길 없구나.

    정녕 알겠으니 저승에 가서 영원토록 선생을 모시려 하는 것이리.

    이전 날 상계의 서당에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서 만났었지.

    그때 그대는 청춘이었고 나는 벌써 털빛이 변하려 했었는데.

    알 수 없는 게 세상일이라 건강한 이와 병든 이가 죽음을 바꿀 줄이야.

    하루살이 세상인 인간사에 겨우 34년을 의탁하시었구려.

                - 오수영(吳守盈-춘당: 송재 이우 외손자, 선성 3筆)

     
  • 상향축문 
  • '常享祝文', '자질은 순진하고 종용함이 뛰어났고 학문은 대방가(大方家)에 물었습니다.
  • 끼치신 교화(敎化)가 끊어지지 않아서 백세토록 더욱 빛나나이다.

    - 이우(李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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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사
  • '유사', '遺事', '1564년(명종 19) 종형(從兄) 입암공(立巖公)이 황해도 감사(監事)가 된 그해 겨울에 선생이 겸암과 서애 두 선생과 함께 해주(海州)의 신광사(神光寺)에 머무르면서 몇 달 동안 공부를 하였다.

    선배들은 일찍이 이 선생(퇴계)의 문하에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와 선생은 천품이 순진하며 학문을 물음에 간절하고 독실함이 공자 문하의 안씨(顔氏) 같다 했다고 한다.

    선생은 문예가 숙달되어 늘 여름 글짓기에서 장원을 하였다. 많은 선비들과 과거장에 임하였을 때 모두들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오늘의 장원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니,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마침내 글 지은 것을 제출하지 않고 나왔다.

    선생은 천성이 효성이 지극해 약관의 나이에 모친상을 당하자 1년 복을 마친 뒤에도 상복을 벗지 않으려 했다. 이에 이 선생이 “선왕(先王)들이 제정한 예를 어길 수 없다.” 하자 선생이 드디어 상복을 벗으셨다.

    금계(錦溪) 황 선생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덕계(德溪) 오 선생이 그 고을 교관(敎官)이었다. 선생이 가서 서로 만나 주서절요(朱書節要)를 강론하였는데, 퇴계 선생이 금계에게 답하신 편지에 “유경문은 의지와 취향이며 견문과 학식이 매우 가상할 만한데 지금 관사에 있다 하며, 또 오자강(吳子强)과 더불어 서로 강론하게 되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이니 다행이다.”라 하였다.

    또 금계에게 보내는 편지에 “전에 와서 묻는 말에 이미 망령된 답을 했는데, 유경문이 이미 가지고 분내로 갔으니 상상해 본다면 지금쯤 받게 될 것이다. 유경문은 순진하고 침착하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와서 반 달 동안 머무르다가 돌아간 지가 겨우 며칠일이다.”라 하였다.

    1564년에 청량산(淸凉山) 보현암(普賢庵)에 있을 때 퇴계 이 선생이 이벽오(李碧梧;농암 이현보子-이문량(금계 황준량 妻父);처조부)·금성재(琴惺齋-금란수)·김읍청(金挹淸-김부의)·김설월(金雪月-김부륜)·류겸암(柳謙菴-류운룡)·이간재(李艮齋-이덕홍)·남비지(南賁趾-남치리) 등 여러 현사들과 같이 산에 들어와서 유람할 때 선생이 보현암으로부터 나와 맞아 모시고 곳에 따라 시(詩)를 주거니 받거니 하여 일시 인(仁)·지(智)의 즐거움이 지극하였다.

    이 선생의 입산시(入山詩)에서
  • “우리 무리가 고요히 구름 사이에 깃들임을 다시금 사랑하노라.”한 것은
  • 아마도 선생을 지목한 것이리라. 또 선생의 시에 차운하여 이렇게 읊었다.
  • “아름답다! 그대의 침착한 성질과 사치를 멀리함이여.
  • 나의 배움은 흡사 뱀의 말을 붙임이나 다름없구나.
  • 절 방을 찾아와서 저녁별이 빛나도록 대화하게 되니,
  • 창 밖에 꽃 없음을 혐의(嫌疑) 적게 여기지 않노라.”

    그해에 낙동강 언덕에 정사(精舍)를 지어 글을 읽고 학술을 강하는 곳을 삼으려 하셨는데, 이 선생이 답하신 편지에 “강가에 편히 쉴 곳은 아직 이룩하지 못하였으니 과연 고상한 마음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시 빨리 하려는 것은 옳지 않으니, 마땅히 형편에 따라 종용히 이루어지는 것이 참다운 의미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 (낙동강 물이 마을을 돌아서 달리다가 산을 만나서 북쪽으로 접어드는 곳인데, 산의 한 가지가 길게 내려오다가 강에 임하여 뭉텅 끊어지고 산골 물이 돌아 흐르니 파(巴)자 형곡이며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지라 선생이 이로 인하여 호를 삼은 것이다.-파산)

    이 선생이 선생에게 “눈앞의 친구들이 학업에 영구히 진취함을 보지 못하였다.”고 하고, 또 일찍이 일(성현)에 향할 신념을 가진 이가 없으니 나의 하는 일이 취신(取信)될 수 없는 것이라 매우 우려된다고 하였다.(김학봉이 기록한 도산 언행록에 있다.) 스승과 문생 간에 서로 더불어 세상일을 함께 근심하는 뜻이 이와 같이 깊고 간절하니, 후세에 선생이 스승에게 애중(愛重)히 여겨짐을 알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이런 점을 보아 짐작할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심에 겸암(謙菴) 선생이 송암(松巖) 권 선생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희범 숙(叔)이 전월 25일에 돌아가셨으니, 우리 집 가화의 참혹함을 어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재주를 품고 기구한 운명에 부딪쳤으며 명이 또 길지 못하니 원통하기 그지없습니다.
  • 근지(近地)에서 교우가 밀접함이 좌하(座下)보다 더한 이가 없었으니, 그 불쌍히 여기는 정은 피차 다름이 없을 것이라서 이에 부음을 고하는 것입니다.
  • 집이 가난하여 계책이 곤란하니 더욱 슬픈 일입니다. 노천(老天)이 알지 못하여 이렇게 되었으니 어찌하겠습니까?”

    1741년(숙종 17)에 향인(鄕人)들이 권화산(權花山-권주)1)· 류입암(柳立巖 류중영)· 류귀촌(柳龜村 류경심) 선생과 함께 네 분을 향사(享祀)치르고자 하였으나, 석당(石塘) 김광원(金光源)2) 공과 구재(鳩齋) 김계광(金啓光)3)이 힘써 그 논(論)을 주창하던 차에 두 공(公)이 모두 세상을 떠남에 따라 이루지 못하였다. 1744년(영조 20)에 사림이 또 선생으로써 노림(魯林)4)의 비지사(賁趾祠-남치리)에 병향하려 하였으나 역시 이루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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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갈명 병서 
  • '墓碣銘', '파산(巴山) 선생의 장지(葬地)가 천등산(天燈山)1) 남쪽에 있다. 선생은 류씨로 이름은 중엄(仲淹)이고 자는 희범(希范)이며, 처음의 자는 경문(景文)이고 파산이 그 호(號)이다.

    본관은 풍산으로 그곳에는 대대로 이름난 분이 있었다. 부친은 참봉(參奉) 공석(公奭)으로 안동 권씨 응삼(權應參)의 딸에게 장가들어 1538년(중종 33)에 선생을 낳았으며, 선생은 막내 숙부 공계(公季)의 양자로 들어가 그 집의 대를 이었다.

    선생의 사촌형인 입암(立巖)과 귀촌(龜村)은 출세하여 조정에 들어가 명신이 되었고, 선생은 나이가 젊어 입암의 두 아들 겸암(謙菴)과 서애(西厓)와 함께 공부를 하였다. 약관의 나이에 모두 함께 도산 문하에서 배웠는데 1570년(선조 3) 겨울에 퇴계 선생이 세상을 떠나시고 그 이듬해 12월 25일에 파산 선생 또한 돌아가시니 그 나이가 겨우 34세였다.

    선생의 부인은 영천이씨(永川李氏)로 효절공(孝節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증손이고 벽오(壁梧) 이문량(李文樑)의 손녀이며, 진사 이학수(李鶴壽-이원승)2)의 딸인데, 후에 선생과 합장하였다. 선생에게는 아들 셋이 있으니 류학룡(柳學龍)·류경룡(柳慶龍)·류종룡(柳從龍)인데, 장남 류학룡에게 아들이 없어 류경룡의 아들 류담(柳衴)이 그 대를 이었다. 둘째 류경룡은 4형제를 두었으니 류현(柳袨)·류담(柳衴)·류적·류겁(柳衱)이며, 세 딸은 각각 이명길(李鳴吉)3)·이제(李褆)·권빈에게 시집갔다. 삼남 류종룡이 4형제를 두었으니 류제(柳禔)·류괴(柳襘)·류하·류전이며 증손과 고손이 이하 몇 사람이다.

    선생이 돌아가신 지 180년이 넘었으나 자손이 빈궁해서 묘에 비석이 없었다. 이에 선생의 고손자인 류세일(柳世鎰)이 그의 친척 아저씨인 졸재공(拙齋公-류원지)이 대강 기록한 선생의 행적(行蹟)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명(銘)을 부탁하였다.
  • 나 광정(光庭)4)이 젊었을 때도 아는 것이 없었는데 팔십이 넘은 늙은 나이에 이 부탁을 맡게 되어서도 우러러 사모하던 마음은 아직 변하지 않았으며 항상 하늘이 부여해준 것을 이상스레 여겼다. 선생의 이와 같은 아름다운 자질에도 불구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 큰 사업의 연구를 마치지 못하였다.

    선생들 집안은 도 형통(亨通)한 대운(大運)을 당하여 겸암(謙菴)과 서애(西厓) 형제가 번성을 누릴 기틀을 얻었으며 그 덕업과 문장이 역사에 남아 길이 빛나게 되었고 또 자손이 크게 번창했는데도 선생 홀로 궁곤(窮困)하고 일찍 세상을 뜨셨으며 자손이 외롭고 미약해서 수백 년이 되도록 아직 선생의 명을 쓴 이가 없었으니 선(善)한 이에게 보답하는 길이 과연 어디 있는가? 선생은 퇴계의 문하에 있을 때 총애를 받았다.

    선생이 일찍 마음을 다스리고 행신을 하는데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을 물으시자, 퇴계 선생은 공자가 인(仁)을 묻는 번지(樊遲)의 물음에 답하면서 덕을 숭상하고 미혹을 분간하는 훈계를 하신 것을 들어 권면(勸勉)하며 이렇게 말씀하였다. “이 몇 말로 미루어 올라가게 되면 무궁한 의미와 사업이 있을 것이다. 내가 힘쓰는 바이나 이룩하지 못하였는데 서로 더불어 힘씀이 다행한 일이다.”

    금계옹(錦溪翁, 황준량-파산 처고모부)이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을 때 편지로 선생을 오라 하여 덕계(德溪) 오건(吳健)과 더불어 주자서를 같이 강론하였다. 또 선생(퇴계)을 대하니, 탄식하시면서 “눈앞에 친구들이 이 일(성현)에 향하는 이가 적어서 일찍 내가 행하는 일이 신뢰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라 하시면서 선생을 격려하시고 권장하셨다.
  • 그렇게 서로 수작(酬酌)하신 말씀과 오고 간 서신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장차 이 도의 부탁을 선생에게 촉망(囑望)하신 것 같다. 그러니 선생이 만약 수(壽)를 누리시어 그 부탁을 모조리 받았다면 도의 전함이 반드시 선생에게 있었을 것인데 아! 안타깝다.

    그러나 스승의 문집에 의하여 선생의 이름이 더불어 없어지지 않을 것이며,
  •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하여 경모(景慕)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될 것이니,
  • 생전에 부귀를 누리다가 이름이 후세에 남지 않은 자와 비교하면 어느 편이 났겠는가?

    정한강(鄭寒岡) 선생이 갓 쓰기 전에 선생과 더불어 황(금계)·오(덕계) 두 현사(賢士)와 주서를 강론하였고, 또 같은 문하에 있으면서도 항상 선생을 존경하고 흠복(欽服)하여 ‘가장 존경하는 친구’라 하였다.

    한 제문에서는 선생에 대해 “평생에 기대가 범상하지 않았으며 훗날의 원대한 뜻은 나의 알지 못함이라.”라고 하였으며, 선배들이 도산의 여러 문인을 평할 때 “선생으로써 남비지와 같이 자질이나 학문이 공자 문하의 안회顔回)와 거의 같았다.”고 하였다.

    이제 명(銘)을 쓰나니, 등림(鄧林)이 무성한데 바람이 그 빼어한 것을 찢어 버렸고 무성한 난초가 병들었으니 철인이 슬퍼합니다. 아! 선생이시여, 불행이 많으십니다. 어찌 뜻은 컸는데 수는 낮았는고. 천등산 기슭에 수목이 울창한 무덤이 있으니 부디 신이나 사람들은 그 언덕을 상(傷)하게 하지 마십시오.

    후학 82세의 원주인 이광정(李光庭) 지었다.

              - 이광정,『파산선생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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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행적 
  • '行蹟', '공의 성은 류씨(柳氏), 이름은 중엄(仲淹), 자는 경문(景文)인데 뒤에 희범(希范)으로 고쳤고, 호는 파산(巴山)이며, 대대로 풍산현 사람이다.

    먼 조상으로 고려의 은사급제(恩賜及第) 류백(柳伯)이 있으며, 그가 도염서령(都染署令)1) 류난옥(柳蘭玉)을 낳았고, 도염서령이 예빈경(禮賓卿)으로서 뒤에 판도판서(版圖判書)2)에 봉해진 류보(柳葆)를 낳았으니, 이상은 모두 고려 때 벼슬하였다.

    판서가 류종혜(柳從惠)를 낳았으니, 그는 우리 조선에 들어와서 공조전서(工曹典書)3)가 되었다. 전서가 류홍(柳洪)을 낳았으니 그는 좌군사정(左軍事正)4)으로 공의 고조가 되며, 증조 류소(柳沼)는 호군(護軍)5)으로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6)이고, 조부 류자온(柳子溫)은 진사로 증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다. 부친 류공석(柳公奭)은 참봉이고 모친은 안동권씨(安東權氏) 권응삼(權應參)의 딸이며, 숙부인 참봉 류공계(柳公季)에게 출계하였다.

    공은 1538년(중종 33)에 나서 1571년(선조 4)에 세상을 뜨니 향년 34세였다. 천품이 매우 아름다워 순진하고 침착하며 깨끗하고 실천의 학문에 전심(專心)하여 퇴계 이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을 하는데 뜻이 독실하여 열심히 배우므로 선생의 기대가 컸다.

    공이 성현의 말씀 중에서 할 일을 물으니 선생이 그 물음이 매우 적절하다 하시고 두 가지를 말씀해 주셨다. 번지(樊遲)가 인(仁)을 묻는데 공자가 “거처에 공손하며 일을 행함에 공경하며 사람과 더불어 사귐에 충성함은 비록 오랑캐 땅에 가더라도 버리지 못할 것이라.”라고 답하신 것과 또 그가 덕을 숭상하고 악을 버리며 미혹을 분간하는 것에 대해 묻자 그 “일을 먼저 하고 소득을 뒤로 하며 자기의 악을 다스리고 남의 악을 책망치 말 것과 잠시의 분(忿)으로 제 몸을 잊어서 어버이에게 욕이 미치도록 하지 말라.”고 답하신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여 주었다. “이 두 조목이 가장 간절한 것이니, 미루어서 나아가면 무궁한 의미가 있으며 또 무한한 사업이 있을 것이다.

    다시 나의 성질이 차근하지 못하고 어리석음을 깨달아 이것을 고치려고 이에 종사하기를 힘쓴 지 오래되었으나 득력(得力)을 못하여 항상 걱정이었는데 공이 자기가 아는 것을 버리고 묻는 데 대해 감히 숨기지 못하는 것이니, 행여나 생각을 두고 힘써 행함에 도움이 된다면 서로 더불어 노력함이 다행한 것이다.”
  • 또 일찍이 공에게 편지를 보내어 “늘 생각하기에 우리 무리 중에서 성질이 도에 가깝고 뜻이 독실하기가 공 같은 이는 한 두 사람 있기도 쉽지 않다.”라 하고, 또 “친구 중에 공 같은 이가 있으되 각기 사고가 있어 항상 같이 거처하면서 갈고 닦는 공부에 서로 도움을 얻지 못한다.”고 하였다.

    선생이 중거(仲擧) 황금계(黃錦溪)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유경문(柳景文)은 의지와 취향이며 견문과 학식이 가상한데 지금 관사에 있다 하니 또 오자강(吳字强)과 더불어 서로 강론하게 되면 반드시 큰 도움이 있을 것이라.”라 하고, 또 “경문(景門)은 순진하고 침착하니 참으로 기쁜 일이며, 반 달 동안 와서 머물다가 돌아간 지 겨우 며칠이다.”고 하셨다.

    한강(寒岡) 정(鄭) 선생은 공(公)과 더불어 같은 문하의 친구로서 평소에 공을 추앙하고 흠복(欽服)하였는데, 그가 안동부사(安東府使)로 왔을 때 공의 묘에 제문하기를 “공의 깨끗한 품행과 침착한 자질은 친구들 중에서 가장 보기 드물었다.”고 하였다. 또 “상종(相從)하여 갈고 닦는 공부에 참으로 존경하는 친구로 대하였고, 평생에 기대함이 보통이 아니었으며 훗날에 원대한 뜻을 가짐은 본시 하류 친구는 알 수 없는 바였다.”고도 하였다.

    선생이나 친구 간에서 칭찬의 말과 깊은 기대가 이와 같았으니 가히 공의 학력과 행검(行儉)의 깊이를 상상하여 알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찍 세상을 떠나셨고 그 남기신 문적(文蹟)도 난리에 잃어 버려 그 배움에 있어 주고받은 내용을 고증할 수 없게 되었다.

    또 나이 어린 아들이 일찍 부친을 여의어 그 부친이 평생 말씀하시던 일이나 행하신 일을 기억 할 수가 없어 거의 백 년이나 인멸(湮滅)되어 찾아낼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 좋은 말씀과 착한 행검이 세상에 전해지지 못해 학자들이 유감스러워 했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을 것인가? 조심스레 노선생(老先生)의 문집 중에서 공에게 주신 편지와 한강 선생의 제문 중 있는 말씀을 상고하여 대략 위와 같이 진술하니 훗날 덕을 기록할 이의 참고가 되게 할까 한다.

                  - 류원지(柳元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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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능동묘소에 입석할 때 고유 
  • '陵洞墓所立石告由', '공손히 생각건대 부군은 빼어난 자질과 깨끗한 성품을 가진 분입니다. 과거시험에서 시지(試紙)를 제출치 않으셨고, 상복을 벗지 않으려 할 만큼 효성이 지극하였습니다. 일찍부터 도산서원에 나아가서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성품이 순하고 차분하시며, 배움에는 본성을 지키라 하셨습니다. 보현암(普賢庵)에서 시를 지어 부르고, 성주 관사의 강회에도 참석하였습니다.

    스승의 칭찬을 자주 받으며 큰 기대를 얻었습니다. 인(仁)을 물으심에는 항상 틀림이 없었고, 도(道)를 근심함에는 한결같았습니다. 단방(單方)을 전하시려는 세밀한 당부에 담긴 뜻이 은근하였습니다. 한 당 내에서 같이 공부에 힘쓸 때 아름다운 형과 어질고 사리에 밝은 조카가 있었습니다. 들어와서나 나가서나 노력을 아끼지 않는 진취가 더욱 뛰어났습니다. 어찌 이렇게 훌륭한 분이 벼슬 없이 요절하셨습니까?

    병선의 광명하던 그 세상이 벌써 200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문호가 쇠잔하고 가세는 빈곤해졌으며 옛 책들이 화재를 입었습니다. 동강 동강 끊어진 편지 조각의 불 탄 나머지를 주워 모았으나 밖으로 알려지지 않은 깊은 덕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노향(魯鄕)에 현인이 많아서 전후에 잇따라 자운(子雲)이 있습니다.

    장례 때 송암(松巖)이 쓴 뇌문(誄文)이 있고 묘에 드린 한강(寒岡)의 제문이 있습니다. 또한 그가 보고 듣고 한 것을 담아 졸재(拙齋)께서 행적을 지었습니다. 이것들을 서로 견주어 가며 눌은(訥隱)이 비문을 지었습니다. 『계문록(溪門錄)』에 기록이 되어 있고 타양서원에 배향이 되었습니다.

    남비지(南賁趾)와 함께 일컬어져 안자(顔子)와 거의 같다 하옵니다. 천리마에 붙임 같은 이름이 그 향기 매우 높습니다. 못난 후손들이 뒤를 옳게 잇지 못하여서 조상의 업을 알지 못하며 그 은덕을 갚지 못함이 애통하옵니다.
  • 4척(尺) 높이의 묘소 앞에는 아직도 묘비가 없었습니다. 어찌 능곡(陵谷)의 변을 보았습니까? 초동목수 보기에도 부끄러웠습니다. 선인들이 이를 두려워해 이에 의견을 모아 경영하는데, 여러 종친들이 합심하였으며 사림도 함께 그 뜻에 따릅니다.

    돌 다듬기를 완전히 마쳐 묘 앞에 서편으로 새웁니다. 만사가 때를 기다린 것 같으며 귀(鬼)와 신(神)이 보호하고 간직하겠지요. 돌을 크지 않게 다듬은 것은 혹 바람에 쓰러지지 않게 하기 위함입니다. 묘비에 선생이라 새긴 것은 퇴계 선생 후손의 공론입니다. 이에 내외분의 무덤 앞에 좋은 날자 택하여 세우나이다. 마멸되지나 않을까 걱정이오며 지나는 사람이 모두 예를 갖출 것입니다. 봉분을 쓸고 추모하며 공손히 맑은 술을 드리나이다. 비옵건대 내리 살피시어 무궁토록 가르치고 도와주옵소서.

    - 류이좌(柳台佐),『파산선생일고(巴山先生逸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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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산정


파산정 96.0×42.0 신나고 시원스럽게 일필휘지로 마무리한 행서이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파(巴)자를 닮았다고 하여 당호로 삼았다.

 

 

 

 

 

 

 

 

 

 

 

 

 


 

이 건물은 파산 류중엄(柳仲淹)을 기리기 위하여 후손들이 건립한 정자이다.

 

 풍천면 소재지에서 광덕으로 가다가 낙동강과 마주치는 곳에서 좌회전하면

  파산정이 낙동강을 바라보며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건물로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한 전형적인 정자건물이다.
류중엄(1538∼1571)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경문(景文),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이다.

 

파산정기 106.0×47.0

 

파산정 둘러보기

파산정은 안동시 풍천면의 낙동강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자리 잡고 있는 파산 류중엄의 정자이다.

류중엄은 1564년(명종 19)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학생을 가르치는 장소로 삼고자

스승인 퇴계 이황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34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길을 가는 사람마다 그곳을 가리키며 애석해 하던 것을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정자를 짓고 파산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아주 단출하다.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주위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동문수학한 남치리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 불렸으며, 타양서원(陁陽書院),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되었다.

유고 몇 편이 『파산일고(巴山逸稿)』에 전한다.

 

http://www.ugyo.net/index.jsp?cat=tu_rin&url=/tu/rin/rind_look.jsp?cat=tu_rin&rincode=KSAC_anps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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巴山亭



1. 位置:安東市 豊川面 道陽里 山3
파산정을 찾아가는 길은 풍산읍에서 하회마을로 향하는 916번 지방도를 이용한다. 이 길은 풍산들을 옆으로 끼고 돌며 안동 김씨 동성마을인 소산리와 안동 권씨 동성마을인 가일을 지나 풍산 류씨 동성마을인 하회마을로 들어가는 중리 삼거리로 연결된다. 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면 하회마을로 향하고 곧 장 가면 풍천면 구담리로 이어진다. 삼거리를 지나 1km 정도 진행하면 풍천면 사무소 조금 못 미쳐 일직의성으로 가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는 갈림길을 만난다.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잠수교인 광덕교를 볼 수 있는데 이 다리를 건너지 않고 왼쪽편에 강변가든 앞으로 난 길로 들어서면 낙동강 기슭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정자를 만날 수 있다.

2. 堂號의 由來
이 정자는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의 정자이다. 파산은 명종 19년(1564)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자 스승인 퇴계 선생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장을 받았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로 길을 가는 사람마다 그곳을 가리키며 애석해 하던 것을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드디어 정자를 짓고 파산정이라 현판을 걸었다.

정자 앞을 흐르는 강물의 흐름이 마치 파(巴) 자를 닮았다고 해서 당호로 삼았다. 정자가 있었던 자리는 큰 고개를 지나 하회마을의 초입 화천서원이 건너다 보이는 둔덕 위에 있었다. 지금은 옛터만 남아 있다. 중건된 현재의 파산정은 외지인들이 찾기에는 다소 외진 곳에 자리잡고 있다.

3. 建築物의 構造와 配置
안동 지역의 대표적인 정자가 모두 그러하듯이 파산정도 정면 3칸 측면 1.5칸의 규모로 아주 단출하다. 하회마을을 감아 도는 낙동강을 바라볼 수 있는 벼랑 위에 건립되어 주위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정자는 자연석으로 죽담을 쌓고 초석을 놓은 후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각주를 사용하였으며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을 얹어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선비의 정신을 엿 볼 수 있다. 공간배치는 어칸에 우물마루를 내고 좌우 협칸에는 구들들인 방을 내어 사계절 지내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했다. 방 앞에는 반 칸의 퇴를 내어 마루를 깔았으며 전면에는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안정감을 주고 있다. 파산정 현판은 어칸의 처마에 게첨하고 있다.



4. 關聯人物
류중엄(柳仲淹, 1538~1571)
선생의 자는 경문(景文), 뒤에 희범(希范)으로 고쳤다. 호는 파산(巴山)이고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참봉 공석(公奭)의 아들로 숙부인 공계(公季)에게 출계하였기 때문에 겸암과 서애의 종숙부(從叔父)가 된다.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의 손자인 이원승의 사위이며 퇴계의 처이질서(妻姨姪婿)이다.
공은 성품이 단아하고 청순한 인품에 일찍부터 명리(名利)와 영달을 초월하여 위기(爲己) 실천(實踐)의 공부에 전념하였는데 퇴계 문하에 나아가 더욱 그 뜻을 굳혔다. 1564년 종형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이 황해도 관찰사로 있을 때 겸암과 서애 형제와 함께 해주의 신광사(神光寺)에서 몇 달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학문과 도덕으로 세상에 크게 쓰일 인물이었으나 애석하게도 퇴계 선생이 돌아가신 이듬해인 선조 4년 12월 25일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동문수학한 남치리(南致利)와 함께 공자(孔子) 문하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고 칭하며 애석해 했다.
분강서원(汾江書院)과 타양서원(陁陽書院)에 제향되었고 불천위로 모시고 있다. 남긴 글은 난리에 유실되었고 몇 편의 글이 『파산일고(巴山逸稿)』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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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산정기


■ 파산정기

황지의 물이 태백산에서 원류가 시발하여 처음으로 도산의 천연을 이루고, 또 남으로 백여 리를 달려 하회에 이르러 산이 활장같이 되었는데, 물은 ‘을(乙)자’ 형으로 흘러 마치 ‘파(巴)자’의 형곡이 되었으니, 참으로 영남의 명승지다. 이러므로 파산 류선생이 지형에 따라서 호를 한 것이다.
선생이 일찍이 강상의 조그마한 언덕에 편히 쉬기도 하며 글 읽는 집을 짓고자 하여 스승에게 묻자, 그 답장에 ‘형편에 따라 차차 이룩하라’는 하명까지 있었는데, 불행히 이루지 못하시고 선생이 일찍이 세상을 떠나시게 되어, 다만 그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어느 언덕이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킬 뿐이었다. 지금 선생의 본손 및 방손과 사림이 모두 같은 뜻으로 선현의 끼치신 자취를 빈터로 버릴 수는 없다고 하여, 이에 답사하고 집을 세울 경영을 하니, 예전에 지정하였던 위치는 조금 비좁고 또 거리가 멀며, 강이 가리어서 수호하기에 힘들었다. 드디어 물을 따라 내려가서 산이 조금 평평한 곳에 새로 정하니, 국세가 약간 넓고 경치가 좋으며, 비록 옛터와는 크고 작음은 다르나, 파자의 형세는 다시 변함이 없으니, 이것은 하늘이 한 좋은 곳을 현인을 위해서 마련해 둔 것 같아 기이한 일이다.
선생은 명종‧선조의 성대에 났는데 문운이 크게 울흥해서 하수와 산악의 정령이 내린 듯 문중이 한때의 성함을 이루었다. 입암‧귀촌과 같은 현인이 있고 또 겸암과 서애 두분 선생으로 더불어 책상자를 지고 도산에 가시어 한 문하에서 공부하시되 고제로서 솥발처럼 대치하였으니 그 얼마나 갸륵한 일인가?
선생은 천품이 순수하고 맑으시며 간절하고 독실하게 학문에 힘써 스승의 기대가 매우 컸다. 오고 간 편지가 삼십여 편이나 되었으되, 모두가 마음을 다스림과 행신하는 요점과 철두 철미하여 종신토록 가슴 속에 새기고자 함 아님이 없었다. 공자 문하의 안씨라고 남비지와 함께 일컬은 그 당시의 공론이 정중할 뿐만 아니라 또 금계와 덕계가 의지와 취향을 높이 보았음과 한강이 가장 존경하는 친구로 대우하였음과 졸재의 지은 행적‧눌은이 지은 비명‧청대의 발문‧속은의 서문 등 스승과 친구의 기대와 칭찬이 이와 같았고, 또 후현들이 높이 사모함이 이와 같았으니, 만약 선생이 수를 조금 더하시어 큰 사업의 궁리를 마치게 되었다면, 사문 의발의 전함이 장차 누구에게 돌아갔을 것인가? 아, 애석하다!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뒤, 집안이 가난하고 화재가 잦아서 책 상자가 여러 번 불속에 들어 문적이 거의 다 없어졌는데, 다행히 스승의 문집이 해와 별처럼 밝은 데서 초고를 뽑아 인쇄까지 하게 되었고, 이어서 타양과 분강 두 서원에 모시게 되었다. 천등산의 묘갈 등에서 가히 공정한 의논이 인멸되지 않음을 알 것이니, 흥하고 폐함과 성하고 쇠함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두 시운에 달린 것이며 억지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다시 선생이 친히 자주 돌아 다니시며 정사를 지으려 하던 곳에 정자를 경영하기로 하여 선생의 당시 뜻하시던 일을 이제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을 보아 일과 힘의 조만은 그 후손의 영체하고 융성함에 있음을 알 것이다.
정자의 제도가 모두 네 칸인데, 좌우는 방이고 중간이 마루이며, 퇴에는 헌함을 달고, 굴곡진 개체에 원장을 둘렀으며, 높지도 않고 크지도 않으니, 이것은 세전한 검소를 명시함이다. 또 후손들이 정자 주위에 사는 수가 많아 서로 가까이 이웃하여서 연화가 조밀함이 상원과 송림 사이로 멀리 어리니, 그 광경이 매우 좋고 화천 정자와 옥연 정사가 멀지 않게 자리 잡고 있어서 조석으로 바라보게 되니, 흡사 생존하실 때 한 방안에서 숙질‧형제가 서로 대하시며 강론하시는 듯하니, 아!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무릇 선생이 도학을 위하여 강상에 정사를 지으려 하시었음은 그 곳에서 강습을 하시고자 함이었다. 이제는 강습할 장소가 이루어졌으니, 학문을 잘 닦는 것이 선조의 뜻을 이음에 제일 먼저 할 일이 아니겠는가? 학업에 부지런할 향념이 있다면 항상 이에 눈 뜰 것이니, 예와 지금이 시대에 합당함이 다르다고 해서 아니 행하지 말고, 오직 날마다 밥 먹고 차 마시듯 하여, 효우를 절대 폐하지 말아서 추로의 옛 고을에 아직도 현송 소리를 듣고, 은나라와 주나라의 옛 예법을 문헌상 증빙할 수 있게 한다면, 어찌 다만 조선에만 빛나리오? 우리 유교에도 도움됨이 또한 클 것이다. 마음에 느낀 것을 쓰고, 따라서 경모하는 성심을 표현하오며, 또 여러분들에게 한 말씀 드릴 것은 우리 무리들 선비는 함께 힘쓰시기를 원하옵니다.

경자년 1월 하순에 도산후학 진성 이상호 삼가 기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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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명 파산일고(巴山逸稿)
유물형태 책판
기탁자 풍산류씨 파산종택
상세설명 『파산일고(巴山逸稿)』는 조선 중기의 학자 유중엄(柳仲淹)의 시문집으로, 불분권 1책의 목판본이다.
1808년(순조 8) 종후손 유이좌(柳台佐)가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이구성(李龜星)의 서문이, 권말에 유이좌의 발문이 있다. 시·만사 13수, 서(書) 32편, 부록으로 만사·제문 각 2편, 행적(行蹟)·묘갈명·유사·계문록(溪門錄) 각 1편, 발(跋) 2편, 상향축문·유묵 각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중에서 서(書)인 〈사문수찰(師門手札)〉은 이황(李滉)과 주고받은 서찰 30여 통을 수록한 것인데, 경전에 대한 논의를 비롯하여 수신제가의 방법과 상례 등 예절에 대하여 질의 응답한 내용들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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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정
 

파산정(巴山亭)은 겸암과 서애의 종숙부이며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로 칭송 받았던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의 정자입니다. 모두 4칸으로 좌우가 방이고 중간이 마루이죠.

 

파산은 1564년(명종 19년) 낙동강 언덕에 정자를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고자 해서

스승인 퇴계 선생에게 물었는데 '형편에 맞게 차차 이룩하라'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미처 그 뜻을 이루기도 전에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이후 길 가는 사람마다 그 곳을 가리키며 애석해 하였던 것을 1960년 사림과 후손들의 노력으로

비로소 정자를 짓고 파산정(巴山亭)이라 현판을 걸었습니다.

 

강물의 흐름이 마치 파(巴)자를 닮았다고 해서 지형을 따서 호로 삼았습니다.

정자가 있었던 당초의 장소는 큰 고개를 지나 하회마을 초입 화천서원(花川書院)이

건너다보이는 둔덕 위였으나 지금은 터만 남아 있습니다.

 

중건된 현재의 파산정은 외지인들이 찾기에는 다소 외진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류재덕 홈피에서)

출처 :류현우가 꾸미는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 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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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류선생 유허비명 병서

(巴山柳先生遺墟碑銘幷書)

 

 

인물(人物)의 태어남은 지령(地靈)을 받아서 정기(精氣)가 한데 뭉치어 태어난다고 하였으니 이른바 인걸은 지령의 것이니라. 우리 류씨(柳氏)의 종가는 하회(河回)마을인데 산과 물이 태극형(太極形)으로 서로 감고 돌아가 자연의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이것은 뛰어난 지세(地勢)요 이름난 구획(區劃)이니라.

 

그리하여 처음으로 여기에 터를 잡은 것은 고려말기(高麗末期)에서 조선초기(朝鮮初期)에 전서선조(典書先祖)인 것이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600여년 사이에 자손(子孫)이 대대로 살아오는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성씨(姓氏)가 지키고 보호(保護)한 유가(儒家)의 커다란 터전인 것이다. 아, 함께 흠모(欽慕)할 것이야! 

 

전서공(典書公)의 덕(德)을 쌓아서 유복(裕福)해진 뒤에 음덕(蔭德)이라 윤택(潤澤)함이 쉬지않고 흘러서 6세(六歲)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입암(立巖), 귀촌(龜村), 권옹(倦翁), 파산(巴山) 여러 어진이가 나란이 함께 하나의 문중(門中)이요 잇따라 문경공(文敬公), 문충공(文忠公)인 맏과 아우의 선생이 있어서 크게 일으켰으며 숲이 무성(茂盛)하게 우거지듯 영남(嶺南)의 빛나는 문벌(門閥)이 되었으니 드러났다고나 할 것인가?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을 서로 받아야 다스려지는 것이니라.

 

삼가 우리 파산(巴山)선생(先生)을 생각하건데 본관(本貫)은 풍산(豊山) 성(姓)은 류씨(柳氏) 휘(諱)는 중엄(中淹) 자(字)는 희범(希范) 초자(初字)는 경문(景文) 호(號)는 파산(巴山)이라 하였다.

 

"동네의 북쪽에 길다란 뱀의 형국(形局)이라 용(龍)이 내려와서 살았다"고 하였다. 속세(俗世)에서는 갱작등(更作嶝)의 뜻으로 이름한 것이다.

 

위조상(祖上)의 휘(諱)는 백(伯)으로서 고려말기(高麗末期) 은사급제(恩賜及第)이다. 실묘(失墓)한 곳에 단(壇)을 모아 비(碑)를 세우고 거듭 전(傳)해 오고 있다. 휘(諱)는 보(보)로써 예빈경(禮賓卿)이며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추봉(追封)되었다. 아들의 휘(諱)는 종혜(從惠)로서 조선(朝鮮)에 들어가 공조전서(工曹典書)이다. 상리(上里)로부터 향리(鄕里:河回)에 들어간 할아버지이다.

 

아들의 휘(諱)는 홍(洪)으로서 좌군(佐軍)의 사정(司正)이다. 이는 선생(先生)의 고조할아버지가 되는 것이다. 증조(曾祖)할아버지의 휘(諱)는 소(沼)로서 호군(護軍)이며 사복시정(司僕시正)에 추증(追贈)되었다. 할아버지의 휘(諱)는 자온(子溫)으로서 진사(進士)이며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아버지의 휘(諱)는 공석(公奭)으로서 참봉(參奉)이다.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서 휘(諱)는 응삼(應參)의 따님이다. 출계(出系)하였는데 작은 아버지의 휘(諱)는 공계(公季)로서 참봉(參奉)이다. 그 뒤를 이었다.

 

선생(先生)은 가정(嘉靖), 무술(戊戌,1538年)에 태어났으며 융경(隆慶) 신미(辛未,1571年)에 세상(世上)을 떠났으니 해를 누린지 삼십사년이다.

 

태어나면서 청렴(淸廉)하고 순박(淳朴)하고 평안(平安)하고 정허(靜虛)하였다. 일찍 도산(陶山)의 문하(門下)에 올라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고 날마다 정진(精進)하였으니 총애(寵愛)를 입을 수 있었다.

 

스승과 문인(門人)사이에 선생(先生)에게 준 서찰(書札)에서 말하기를 "늘 생각하건데 벗이 있었다면 그대와 놀았으나 각각 사연(事緣)이 있었던 까닭으로 늘 그대와 함께 같은 곳에서 할 수 없었으나 자질(資質)로써 절차탁마(切磋琢磨)의 공(功)이 슬퍼고 한(恨)스럽지 아니한가?" 또 말하기를 " 늘 동류(同流)의 동배(同輩)를 생각하건데 중화(中和)의 성정(性情)에 가깝고 그리고 지행(志行)과 독학(篤學)으로 현인(賢人)과 같은 사람이 쉽지 아니한데 한둘은 헤아려진다" 라고 하였다. 곧 그것에 기대(期待)하고 장학(奬學)을 바라보면 조정(調整)의 절실(切實)함이니 가히 이것으로 미루어 상상(想象)할 것이니라. 또 집안에 있어서도 입암(立巖), 귀촌(龜村), 모든 종형(從兄)과 함께 절차탁마(切磋琢磨)의 도의(道義)는 스스로 하나의 집안을 이뤘으니 정말 이른 바 등림(鄧林)의 좋은 재목(材木)일 것이니라.

 

아! 선생(先生)이 나가서는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많은 제자(弟子)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가 되었고 들어가서는 하회(河回)마을에서 여러 현인(賢人)이 되었으나 스승에게서 가르침을 받아 성숙(成熟)해질 무렵 중도(中途)에서 갑자기 요절(夭折)하였다.

 

하늘은 어찌 그르르 주어서 이미 두터웠으나 그를 빼앗기에 이토록 빨랐을까? 비록 수면(壽命)이라 말할 것이나 의외(意外)라고 아니할 수 없으니 문중(門中)의 슬픔이요 사문(斯文)의 액운(厄運)이다. 그렇다. 성품(性稟)은 순박(淳朴)하고 자질(資質)은 정허(靜虛)하여 도(道)에 가까와 마음을 쓰는데 순진(純眞)하였으니 세상(世上)에서 공자의 문인(門人)에 안씨(顔氏)가 있다고 칭송하였다. 어찌 많은 것을 바라겠는가?

 

선생(先生)이 세상(世上)을 떠난 뒤에 사림(士林)에서는 그의 덕(德)을 숭상(崇尙)하려고 하여서 분강(汾江)과 타양(陀陽)의 서원(書院)에 배향(配享)하고 묘당(廟堂)에는 영원(永園)토록 선생에게 제사(祭祀)를 올리니 어떤인들 슬플 것인가?

 

자손(字孫)들은 여러 대대로 이어져 조상(祖上)의 무덤이 있는 고향(古鄕)에 살아가는 것인데 십수대(十數代)이며 사백여년(四百餘年)이나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이 떨어지지 않은 것이니라. 세태(世態)의 변천(變遷)으로 북쪽 강(江)을 건너서 수리(數里)쯤 형호리(衡湖里/저우리 광덕)에 옮겨 살고 있는데 행사(行事)가 있을 때에는 서로 돕고 힘을 모아 함께 하는 의리(義理)는 같이 살아가며 단합(團合)하고 모이는 그런 것과 다름이 없다. 오히려 이산(離散)해서 찾는 한(恨)스러운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곧 파산등(巴山嶝)위에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그것으로써 추모(追慕)의 목적(目的)에 부쳤으니 머리쪽 언덕에는 잊지못할 후손(後孫)의 정성(精誠)일 것이니라. 하몰며 그 땅에는 또 이것이 선생(先生)의 생가(生家) 백씨(伯氏)인 모하당공 선생 기적비(慕河堂公先生紀積碑)의 곁일 것이니라. 생전(生前)에 흡족(洽足)하지 못했으나 화용(華容)에 미치는 인연(因緣)이며, 다시 땅 위에서 이어지는 계기(契機)일 것이야, 선생(先生)의 음덕(蔭德)이 흐른다는데 의심(疑心)하지 않는다.

 

아들의 휘(諱)는 학룔(學龍), 경룡(慶龍),종룡(從龍)이며 손자(孫子)의 휘(諱)는 담(담), 현(현), 체(체),급(급),제(제), 괴(괴), 하(하), 전(전)이 있으며 모두 유학을 하였다. 구세손(九世孫) 휘(諱)는 희춘(희春)으로서 선생(先生)의 문집(文集)을 간행(刊行)하였다. 

 

십세손(十世孫) 휘(諱)는 만조(萬祚)로서 성균진사(成均進士)이다. 십오세(十五世) 창손은 시웅(時雄)이며 나머지는 모두 수백인(數百人)이라 모두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하루는 예손(裔孫)도창(道暢), 동걸(東杰)씨가 하회(河回)마을의 집에 나를 찾아와서 비문(碑文)을 청(請)하였다. 변변치 못한 사람이라 글을 못하는 것이라고, 감히 감당(勘當)하지 못한다고 부치고 그것에 두세번씩이나 사양(辭讓)한 것이다. 제씨(弟氏)들이 말하기를 "우리 선조(先祖)의 사적(事跡)을 다 아는 사람이라" 하였다. 

 

내가 그와 같은 뜻이 없다고 했지만 그것을 맡아서 부지런함이 나으리라 하였다. 그것에 내가 선생(先生)의 마음을 우르러 사모(思慕)하는데 남에게 뒤지지 않으리라 돌아보지 않아도 이미 모하공(慕河公)의 기적비문(紀積碑文)을 지었는데 중첩(重疊)함에 있어서 의심(疑心) 적다고 하더라도 옹졸(壅拙)함을 잊고서 위에 서술(敍述)하였다. 그렇다고 어찌 감히 말하랴?

 

선생(先生)의 그윽한 덕(德)을 밝히는 데 만(萬)의 하나라도 이를 것인가?

 

 

                         새기는 말에서

 

삼가 선생(先生)을 생각하건데

하회(河回)마을에서 대대로 문벌(門閥)일세

도에 가까운 자태(姿態)는

순박(淳朴)하고 정허(靜虛)한 자질(資質)이네

등림(鄧林)의 좋은 재목(材木)으로

도산(陶山)의 많은 제자(弟子) 가운데 특히 뛰어난 제자(弟子)이네

뜻밖으로 누(累)를 끼칠 것이 없고

성학(成學)에 잠심(潛心)하였네

걸어 다녀도 현인(賢人)이 있으므로

도의(道義)로 매우 즐거웠네

스스로 하나의 집안을 이루었으니

문중(門中)이 빛나고 있네

순수(純粹)한 덕행(德行)으로 진실(眞實)하게 일했지만

중도(中途)에서 원통(寃痛)하게 요절(夭折)하였네

공자(孔子)의 문인(門人)에 안씨(顔氏)라고 칭송(稱頌)했으니

세상(世上)의 여론(輿論)에서도 의심(疑心)하지 않았네

이는 하회(河回)마을의 화목(和睦)으로

향기(香氣)가 넘치어 그치지를 않았네

하나의 물가와 하나의 언덕에도

옛자취가 아닌 것이 없네

자손(子孫)들 대대로 살면서

가업(家業)을 이어받았네

세태(世態)의 변천(變遷)이 있어서

광덕리(廣德里)에 옮겨 살고 있네

옛터는 쓸쓸한 모양이나

푸른 자연(自然)은 옛빛깔 그대로이네

먼 조상(祖上)을 사모(思慕)하면서 두루

돌아다니는 것도 절실(切實)한데

유허비(遺墟碑)를 세웠네

땅은 파산(巴山)에 점유(点有)하였으니

백씨(伯氏) 모하당공(慕河堂公)의 곁이네

살아서 다하지 못한 인연(因緣)인데

땅위에서 다시 이어지네

 

                 해는 갑신(甲申 ,2004年) 늦가을

                       후학 방예손 단하 삼가 지음

 

 

   ◆참고자료: 풍류회지 14호/ 柳啓榮님이 올린 글을 옮겨 적었습니다.
       

                                2006.  1. 23    류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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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문하의 안연: 파산 류중엄 선생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의 현인으로 추앙받는 안연[본명:안회顔回]은 공자가 가장 아꼈던 제자였다.

안연은 스승의 사상을 이어받으면서 예와 인을 중시하였으며 덕행이 뛰어난 현자로 널리 존경받았다.

그는 집안이 매우 가난하였음에도 그 어려움을 안빈낙도의 심법으로 잘 극복하였으며 이는

스승으로부터도 높이 평가되었다.

 

그러나 그는 지독한 가난에 의해 몹시 병약하여 30세를 갓 넘겨 요절하고 말았다.

공자는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였다고 한다.

안연은 비록 젋은 나이에 요절하였지만 후세에 이르도록 공자의 首제자로 인식되며 추앙받았다.

우리나라의 대학자 퇴계 이황의 문하에도 안연과 같은 퇴계의 제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파산 류중엄[1538~1571}으로 자는 경문景文,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巴山이며 본관은 풍산이다.

파산 류중엄은 류공석의 아들이며, 겸암 류운룡[1539~1601], 서애 류성룡[1542~1607] 형제의 

(5촌) 從叔인데다가 퇴계이황선생의 스승인 농암 이현보의 曾孫壻(손자의 사위)이기도 하다.

그는 1538년생으로 자신과 연령대가 비슷한  從姪(5촌 조카)인 겸암 형제와 함께 퇴계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고 서로 학문에 대한 토론을 자주 하였다.

 

또한 스승 퇴계와 학문에 대한 문답을 서신에 담아 30여회에 걸쳐 주고 받았고 황준량 공이 성주목사로 재임할 적에 오건 선생과 함께 주희 선생의 성리서를 서로 강론하기도 하였다. 

 

파산은 문장과 행의가 고명하여 일찍이 스승으로부터도 신임을 받았지만 선생이 별세 한 후

1년이 채 안되어 34세의 나이로 병사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후세 사람들과 그를 아꼈던 모든 사람들은 파산을 일컫어 '퇴계문하의 안연'이라고

하며 그의 재능과 학문을 애석히 여겼다.

 

저서로는 파산일고巴山逸稿가 있으며 그의 학문과 덕행을 숭모하는

유림에서는 불천위로 제정하여 지금까지도 해마다 그의 후손들이 불천위를 지내고 있다.

 

                                        2006. 6. 19  류돈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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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류중엄 (巴山 柳仲淹) 불천위제사 (12월 25일, 비위 4월 8일)

 

신주면 고위; 현 선조 고 파산 처사 부군 신주 顯先祖考巴山處士府君神主

 

배위: 영천이씨 진사 휘 원승元承公 (농암 이현보 손자)의 따님 

신주면 : 현 선조 비 유인 영천 이씨 신주  顯先祖비孺人永川李氏神主

 

묘; 서후면 증동 합폄

안동 분강서원, 타양서원에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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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柳仲淹



□ 位置 : 安東市 豊川面 廣德1里 111番地 巴山宗宅

□ 神主
◦ 考位; 顯先祖考巴山處士府君神主
◦ 配位; 顯先祖妣儒人永川李氏神主

□ 諱日
◦ 考位 : 12月 24日
◦ 配位 : 4月 7日

□ 略歷

선생의 본관(本貫)은 풍산(豊山)으로 중종(中宗) 33년(1538)에 태어나 선조(宣祖) 4년(1571)에 몰(歿)하였다.

 

자(字)는 희범(希范)이고 호(號)는 파산(巴山)이다.

 

선생은 참봉(參奉) 공석(公奭)의 아들로 숙부(叔父)인 공계(公季)에게 출계하였고 겸암(謙菴)과 서애(西厓)의 종숙부(從叔父)가 된다. 입암(立巖) 중영(仲郢)의 종제(從弟)이다.


공은 퇴계(退溪) 선생의 문인(門人)으로 종질(從姪)인 겸암(謙菴), 서애(西厓)와 동문수학(同文修學)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專心)하였으나 34세에 조몰(早歿)하였다.

 

선생은 비지(賁趾) 남치리(南致利) 선생과 함께 세칭(世稱)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안자(顔子)에 견주어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고 칭했다.


선생은 분강서원(汾江書院)과 타양서원(陁陽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저서는 거의 난리에 유실되고 몇 편의 글이《파산일고(巴山逸稿)》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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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 류중엄; 퇴계학연구 17집 ,167- 174쪽

 

류중엄은 자가 희범인데 처음의 자는 경문이었다.

호는 파산, 본관은 풍산이며 안동에 살았다.

 

가정 무술년(1538)에 태어났으며 선생의 문하에 와서 노닐었다.

선생이 황금계(황준량 ;1517-1563/ 퇴계문인,문과, 단양군수 성주목사/파산의 처고모부)에게

보내는 서신에서, "류희범은 지향하는 뜻과 식견이 참으로 아름답다" 라고 하셨고

또 "희범이 순수하고 고요한 것이 참으로 기쁘다"라고 하셨다.

 

공자 문하의 안자顔子(31세 요절하자 공자가 하늘이 나를 버렸다고 탄식함)라는

일컬음이 있었으니 34세에 작고하였다.

 

*파산 류중엄; 퇴계학연구 17집- 퇴계선생 제자전기 3 ,1997, 경상북도, 167-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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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양서원

타양서원 묵직묵직하여 흐트러질 수 없고 단단하게 자리매김한 해서체이다.


이 건물은 정평공(靖平公) 손홍량(孫洪亮),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 파산(巴山) 류중엄(柳仲淹)을 제향하기 위해 설립된 서원이다. 서원내 각 건물마다 상현사(尙賢祠)·경앙문(景仰門 )·성경당(誠敬堂)·진수재(進修齋)·사의재(思義齋)·숭모재(崇慕齋)라 쓴 현판이 게판되어 있다.

 

안동에서 중앙고속도로로 남안동 I.C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는 일직면 조탑리 마을 안에

위치하고 있다.


1741년(영조 17)에 건립된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일직 송리 뒷산에

단(壇)을 쌓아 제향해 오다가 1984년 사림에 의해 복설되었다.

매년 3월 중정일에 제향하고 있다.

 

서원내에는 사당인 상현사, 강당인 성경당, 전사청과 동재, 주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인 성경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배치하였는데 좌측방이 사의재이며

우측방이 숭모재이다. 서원의 대문은 경앙문이다.


손홍량(1287~1379)의 본관은 일직(一直)으로 충선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첨의평리 판삼사에

    올라 복주부원군에 봉해졌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나아가

    맞이하니 왕이 “그대는 참으로 일직한 사람이다(子誠一直之人)”라고 치하했다 한다.

    시호는 정평공이다.


김자수(1351~1413)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자는 순중(純中)이며, 호는 상촌으로

                              정평공 손홍량의 외손자다.

        공민왕 23년에 사마시를 거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관찰사에 이르렀으나

        조선 개국과 더불어 형조판서로 부름을 받고 길을 떠나 경기도 광주 추령에 이르러

        고려의 망국을 비관하여 자결하였다.


류중엄(1538~1571)의 본관은 풍산(豊山)으로 자는 희범(希范)이며 호는 파산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종질(從姪)인 겸암 류운룡, 서애 류성룡과 동문수학하여

     학문에 침잠했으나  34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비지 남치리와 함께 ‘계문(溪門)의 안자(顔子)’라는 칭호를 받았다.
       일고(逸稿) 1책이 남아 있다. 1977년에 국역 간행되었다.

█ 답사노트
일직면 조탑리 마을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도로변에서 서원의 존재를 알아챌 수 없다.

한 두 번 이곳에 와보았더라도 좁은 골목길 진입로를 수월하게 발견할 수 없다.

 

이 서원에 배향된 세분은 모두 우뚝한 인물이었다.

정평공 손홍량은 일직 손씨의 시조로 뿐 아니라 고려조에 한결 같은 충성을 다한 분 이었고,

상촌 김자수는 조선왕조의 부름을 받자 서울로 가던 도중에 자결하고

고려와 운명을 같이한 충신이며,

파산 류중엄은 ‘퇴계(退溪) 문하의 안자(顔子)’로 칭송을 받았던 학자였다.

                                               상현사 59.0×26.0

사당의 현판으로, 단정하고 절제된 아름다움으로 흐트러짐 없는 안정된 해서체이다.


                         경앙문 89.5×36.0

매우 탄탄하고 강직하며 모두를 휘어 잡을 것 같은 힘이 있는 해서체이다.


                                  성경당 104.0×42.0

서원 강당의 당호인 이 현판은 힘이 차고 강인함을 부드럽게 조화시켜 편안함을 주는 해서체이다.


                                                 진수재 97.0×37.0

              무겁고 강한 힘을 분산시킴으로 날아 갈 듯한 편안함을 주는 해서체이다.


                       사의재 98.5×38.5 

강하고 시원스러우면서도 묵직함을 간직하여 든든한 해서체이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의리를 생각하여 행동한다(見利思義)는 뜻이다.


                               숭모재 96.0×37.0  

강한 필력으로 듬직함이 거스를 수 없는 힘을 보여줘 믿을수 있는 해서체이다.

출처 : 영남지리답사
글쓴이 : 松河 李翰邦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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