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선비<한강 정구1>남명 퇴계학문 진수 이어
남명과 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퇴계는 영남좌도의 중심지인 안동에서, 남명은 영남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에서 각각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퇴계의 문하를 찾기도 하며 퇴계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남명의 문하도 찾아 일찍이 보기드문 학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가 있으니 바로 寒岡 鄭逑이다.
한강은 1543년 星州郡 大家面 七峯洞 柳村에서 판서공 思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淸州이며 자는 道可이다.
선대에는 서울서 살았는데 조부 승지공 응상(應祥)이 환원당 김굉필의 사위가 되자 판서공이 현풍 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혼인을 한 관계로 서울로부터 성주 유촌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러니까 동방 5현중 한사람이며 소학동자라 불리는 한원당이 한강의 외증조부가 된다.
한강의 할머니 즉 한원당의 딸은 효성이 지극하여 친정아버지가 몸이 불편할 때 국을 맛있게 끓여 성주 대가에서 현풍까지 1백여리길을 와서 대접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한강이 태어나자 판서공이 "이 아이는 장차 명현(名賢)될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한다.
5세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으며, 7세때는 논어와 대학을 배워 그 뜻을 알았다. 9세 되던해 부친상을 당하자 상에 임하는 범절이 예사롭지 않았다.
13세때 당시 성주 교수로 와 있던 남명의 제자 덕계 오건에게서 주역을 배웠는데, 이때 덕계가 한강의 자질 뛰어남을 보고 여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스승이 될 사람은 마땅이 鄭生이다"라고 하였다. '덕계선생연보'에 의하면 덕계가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해는 39세때(1559년)로 되어있다. 한강의 나이는 17세때이다. 덕계는 한강의 종이모부로 한강이 13세때 덕계를 만났다면 성주향교 교수로 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21세때 퇴계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이때 한강은 퇴계선생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고 돌아왔다. 한강이 돌아가고 난 후 퇴계는 유희범에게 보낸 편지에 "정구가 하루를 머물고 갔는데 매우 영민하더라"고 하면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해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12월 광주 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바로 귀향을 하였다. 이후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4세 되던해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남명선생편년에 의하면 "선생께서 산해정에 계셨는데 한강이 와서 달포를 모시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금인물의 어짐과 어리석음, 세상이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상 도덕, 시대의 변화, 옳고 그름, 바름과 삐뚤어짐, 벼슬에 나가는일과 물러나는 일, 말을 할때와 묵묵히 있을 때 등등 광범위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남명은 명리에 초연한 한강을 대견하게 여겨 말하기를 "자네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으니 내가 마음으로 인정하노라. 군자의 큰 절개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한강은 남명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에 나갈때와 물러날 때를 신중히하여 처신을 하였다.
31세때 조정에서 재능과 학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고향 사람인 동강 김우옹이 수찬으로 있으면서 한강을 추천하여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창평산(蒼坪山)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주자의 '한천(寒泉)'의 뜻을 따서 한강정사라(寒岡精舍)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환원당 선생 연보 및 사우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어 조정에서 건원릉참봉, 의흥, 삼가,지례현감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번 벼슬을 사양한 뒤, 38세때 창녕현감에 제수되어 첫 벼슬길에 나갔다. 임지로 떠나기전 임금이 한강을 보고 "목민관이 되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가"라고 물었다. 한강은 곧 "옛사람들이 백성 보살피기를 갓난아기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으니 신은 어리석으나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임지로 떠났다. 창녕현에 부임하여서는 고을 선비들과 함께 呂氏鄕約을 본떠서 講會契를 만들고 현내 여러곳에 서재를 세우고 훈장을 선정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부임 1년만에 감사가 치적을 보고하는데, 최고의 성적을 얻어 사헌부 지평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41세때 강원도사, 충청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창평에 檜淵草堂을 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44세때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옛날 좋은 풍속을 되살리고 낡은 행정의 폐단을 고치며, 각종 저울들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시정했다. 또한 고을 어진 선비들과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강은 창녕에 처음 부임해서부터 부임지역마다 군지를 편찬하여 그 지역의 역사와 문물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후임자들의 참고자료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임란 중에도 중지하지 않았다.
1592년 통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한강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왜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있을 때 조정에서 곽장군에 대한 비방과 모함이 많았다. 선조가 곽장군에 대해 한강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곽재우의 인물됨은 작은 진주만을 맡아 싸우기에는 보다 큰 그릇입니다" 라고 하여 곽재우 장군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이후 강원도 관찰사, 형조참의,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60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62세되던 해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66세때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이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에 불가 상소를 누차 하였으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내게 된다.
77세때 金海 新山書院을 배알하고 동래온천, 창원 觀海亭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어 이듬해 泗陽精舍 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그후 1623년 인조 1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2년후 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효종 8년(1657년)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997.6.27.경남일보)
남명과 퇴계는 같은 시대를 살면서 퇴계는 영남좌도의 중심지인 안동에서, 남명은 영남우도의 중심지인 진주에서 각각 전국의 인재를 대상으로 강학(講學)을 하였다. 당시 남명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퇴계의 문하를 찾기도 하며 퇴계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 남명의 문하도 찾아 일찍이 보기드문 학문의 성세를 이루었다.
이처럼 남명과 퇴계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 두 사람의 학문을 이어받아 이를 다시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한 이가 있으니 바로 寒岡 鄭逑이다.
한강은 1543년 星州郡 大家面 七峯洞 柳村에서 판서공 思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본관은 淸州이며 자는 道可이다.
선대에는 서울서 살았는데 조부 승지공 응상(應祥)이 환원당 김굉필의 사위가 되자 판서공이 현풍 외가에 와 있으면서 성주 이씨와 혼인을 한 관계로 서울로부터 성주 유촌으로 옮겨와 살게되었다. 그러니까 동방 5현중 한사람이며 소학동자라 불리는 한원당이 한강의 외증조부가 된다.
한강의 할머니 즉 한원당의 딸은 효성이 지극하여 친정아버지가 몸이 불편할 때 국을 맛있게 끓여 성주 대가에서 현풍까지 1백여리길을 와서 대접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오기도 한다.
한강이 태어나자 판서공이 "이 아이는 장차 명현(名賢)될 것"이라며 기뻐하였다 한다.
5세때 이미 신동이라 불렸으며, 7세때는 논어와 대학을 배워 그 뜻을 알았다. 9세 되던해 부친상을 당하자 상에 임하는 범절이 예사롭지 않았다.
13세때 당시 성주 교수로 와 있던 남명의 제자 덕계 오건에게서 주역을 배웠는데, 이때 덕계가 한강의 자질 뛰어남을 보고 여러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의 스승이 될 사람은 마땅이 鄭生이다"라고 하였다. '덕계선생연보'에 의하면 덕계가 성주향교 교수로 부임한 해는 39세때(1559년)로 되어있다. 한강의 나이는 17세때이다. 덕계는 한강의 종이모부로 한강이 13세때 덕계를 만났다면 성주향교 교수로 오기 이전의 일일 것이다.
21세때 퇴계선생을 찾아 배움을 청했다. 이때 한강은 퇴계선생과 하룻밤을 지내면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고 돌아왔다. 한강이 돌아가고 난 후 퇴계는 유희범에게 보낸 편지에 "정구가 하루를 머물고 갔는데 매우 영민하더라"고 하면서 그 재능을 칭찬하였다. 이해 가을 향시에 합격하고 12월 광주 이씨와 결혼을 하였다.
이듬해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갔으나 마음에 느낀 바가 있어 바로 귀향을 하였다. 이후 과거에는 마음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24세 되던해 남명 선생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 남명선생편년에 의하면 "선생께서 산해정에 계셨는데 한강이 와서 달포를 모시면서 의심나는 것을 질문하였는데 선생께서 가르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고금인물의 어짐과 어리석음, 세상이 다스려짐과 어지러움, 세상 도덕, 시대의 변화, 옳고 그름, 바름과 삐뚤어짐, 벼슬에 나가는일과 물러나는 일, 말을 할때와 묵묵히 있을 때 등등 광범위하게 문답을 주고받았다.
남명은 명리에 초연한 한강을 대견하게 여겨 말하기를 "자네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으니 내가 마음으로 인정하노라. 군자의 큰 절개는 벼슬에 나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로부터 한강은 남명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에 나갈때와 물러날 때를 신중히하여 처신을 하였다.
31세때 조정에서 재능과 학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라는 명이 있자, 고향 사람인 동강 김우옹이 수찬으로 있으면서 한강을 추천하여 예빈시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창평산(蒼坪山)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주자의 '한천(寒泉)'의 뜻을 따서 한강정사라(寒岡精舍)라 하였다. 이듬해에는 환원당 선생 연보 및 사우록을 편찬하였으며, 이어 조정에서 건원릉참봉, 의흥, 삼가,지례현감 등의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여러번 벼슬을 사양한 뒤, 38세때 창녕현감에 제수되어 첫 벼슬길에 나갔다. 임지로 떠나기전 임금이 한강을 보고 "목민관이 되어 무엇을 먼저 해야 되는가"라고 물었다. 한강은 곧 "옛사람들이 백성 보살피기를 갓난아기 보살피듯 하라고 하였으니 신은 어리석으나 이 말을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임지로 떠났다. 창녕현에 부임하여서는 고을 선비들과 함께 呂氏鄕約을 본떠서 講會契를 만들고 현내 여러곳에 서재를 세우고 훈장을 선정하여 학문을 가르치게 하였다.
부임 1년만에 감사가 치적을 보고하는데, 최고의 성적을 얻어 사헌부 지평 등의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였다. 41세때 강원도사, 충청도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창평에 檜淵草堂을 지어 제자들과 더불어 月朔講會契라는 모임을 만들어 규약을 정하여 학문에 정진하였다.
44세때 함안군수로 부임하여 옛날 좋은 풍속을 되살리고 낡은 행정의 폐단을 고치며, 각종 저울들을 통일하여 백성들의 세금을 감해주고 백성들의 억울한 사정이 없도록 시정했다. 또한 고을 어진 선비들과 군지인 함주지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한강은 창녕에 처음 부임해서부터 부임지역마다 군지를 편찬하여 그 지역의 역사와 문물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겨 후임자들의 참고자료가 되게 하였는데, 이는 임란 중에도 중지하지 않았다.
1592년 통천군수로 있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때 한강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고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로 하여금 적을 공격하게 하여 왜적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영남에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물리치고 있을 때 조정에서 곽장군에 대한 비방과 모함이 많았다. 선조가 곽장군에 대해 한강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곽재우의 인물됨은 작은 진주만을 맡아 싸우기에는 보다 큰 그릇입니다" 라고 하여 곽재우 장군을 도와 주기도 하였다.이후 강원도 관찰사, 형조참의, 충주목사, 안동대도호부사 등의 벼슬을 지내고 60세때 고향으로 돌아와 62세되던 해에 무흘정사(武屹精舍)를 지어 학문에 힘썼다.
66세때 광해군이 즉위하여 대사헌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임해군을 죽여서는 안된다는 상소를 하고 뜻대로 되지 않자 곧 사직하고 말았다. 이어 영창대군 사사, 인목대비 폐비 등에 불가 상소를 누차 하였으나 광해군은 듣지 않았다. 이런 일로 다시는 조정에 발을 들이지 않고 고향에서 제자들을 양성하며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생을 보내게 된다.
77세때 金海 新山書院을 배알하고 동래온천, 창원 觀海亭을 둘러보고 돌아왔다. 이어 이듬해 泗陽精舍 持敬齋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그후 1623년 인조 1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2년후 文穆이란 시호를 내렸다. 효종 8년(1657년)에 다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1997.6.27.경남일보)
출처 : 사는동안
글쓴이 : 권혁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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