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시습(金時習)은 유(儒), 불(佛), 선(仙)이라는 동양의 3대 정신을 아우르는 사상가이자, 타고난 천재성과 뛰어난 문장으로 일세를 풍미한 기인이었다. 현실에서는 이룰 길이 없는 포부와 역량을 한탄하며 '시대의 고아'로 불우한 일생을 마쳤지만, 그가 꿈꾼 이상세계를 작품을 통해 승화시킨 고귀한 예술혼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비판과 야유를 넘어 일봉의 허무 의식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미 이루어진 현실을 또 다른 목적으로 무너뜨리려고도 하지 않았다. 불의를 인정하거나 그것에 동참하지는 않았지만 타도하려고도 하지 않은 중용(中庸)의 자세를 견지한 셈이다. 생전에 김시습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
'모습은 지극이 못생겼고 말 또한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으로 너를 버릴지어다.'
자신의 삶을 예언한 말 같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하는 강한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볼 때 김시습은 표리부동(表裏不同)한 인간사에서 신의를 지키며 일생을 일관되게 산 참된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사상은 '인간의 의지'가 근본이 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자신의 신념과 의지를 현실에서도 실천해야 한다는 그의 사상체계는 주기철학(主氣哲學)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김시습의 의지론적 실천 철학은 서경덕(徐敬德)과 이율곡(李栗谷)에 의하여 계승, 발전되었으며 조선시대 성리학에 있어서 독특한 철학으로서 한 줄기를 이루었다.
김시습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배격하고 스스로 땀 흘려 일하며 살아가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백성의 행복과 평안한 삶이 무엇보다도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강조하였다. 이런 점에서는 철저한 민본주의 사상가이기도 하다.
● 총명하였지만 불행한 소년
김시습은 세종(世宗) 재위 17년(서기 1435년)에 한성에서 태어났다. 야사(野史)에서는 김시습이 태어나기 전날 밤, 근처에 있던 성균관 유생들이 그의 집에서 공자(孔子)가 태어나는 꿈을 꾸었는데, 정말로 다음 날 김시습이 태어나자 장차 귀한 인물이 될 징조라고 믿었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웃에 살던 최치운(崔致雲)이 논어(論語)에 나오는 말을 따서, '배우면 곧 익힌다'는 뜻으로 시습(時習)이라고 짓기를 권하여 그대로 따른 것이다.
이러한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듯이 그는 태어난 지 여덟달 만에 글자를 알았고, 세살 때에는 이미 시를 지었을 뿐 아니라 소학(小學) 등도 읽어 그 뜻을 깨달았다고 한다. 배우지 않아도 스스로 깨닫는, 말 그대로 천재였던 것이다. 다섯살 때 홍문관 수찬으로 있던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공부에 전념하면서 그의 천재성이 장안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허조(許稠)라는 정승이 어린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그의 집을 찾았다. 김시습을 만난 허조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네가 글을 아주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해 '늙을 노(老)'자를 넣어 시 한 구절만 지어 줄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시를 지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老木開花心不老].'
허조는 과연 신동이라고 감탄하며 돌아갔고, 이 소문은 급기야 대궐에까지 전해졌다. 당시 임금이었던 세종은 박이창(朴以昌)에게 사실 여부를 확인해보라고 지시하였다. 박이창은 대궐로 불려 온 어린 김시습의 능력을 여러 방면으로 시험해 봤으나, 어린 나이라고 도저히 믿어지지 않을 만큼 김시습이 어느 것 하나 막힘 없이 대답하자, 항간의 소문이 틀림없음을 국왕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세종은 김시습의 재주를 가상히 여겨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했다. 이에 어린 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움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신동이 났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계전의 문하에서 학문의 기초를 익힌 김시습은 이어서 성균관 대사성을 역임한 김반과 별동 윤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를 계속하여, 겨우 십여세에 익히지 못한 책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주위의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훌륭한 스승 밑에서 학업에만 열중하던 그에게 불행이 닥 쳐오기 시작했다.
김시습이 열다섯살 때, 어머니 장씨(張氏)가 세상을 떠나 외가에서 지내게 되었으나, 3년이 못 되어 믿고 의지하던 외할머니마저 별세하고 말았다. 다시 본가로 돌아왔지만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있어 오히려 그에게 짐만 될 뿐이었다. 이 와중에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지만, 학문에 심취한 김시습은 가정에 흥미를 잃고 아예 삼각산(三角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심각산 중흥사(中興寺)에 머무르며 독서에 전념하던 김시습에게 엄청난 소식이 전해졌다.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어린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통분을 금치 못하고 꼬박 사흘 동안 망년자실하여 방 안에만 틀어박혀 있던 김시습은 공부하던 책을 모아 모두 불태워 버렸다. 그러고는 머리카락마저 잘라 버리고 산을 내려와 세상을 방황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스물한살 되던 해의 일이었다.
● 분노와 회한의 방랑 생활
아무 계획 없이 방랑 길에 나선 김시습이었지만 어려서부터 워낙 명성이 높았던지라 어디를 가도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더구나 자연의 섭리 그대로 꽃피고 낙엽 지는 자연과 호홉하니 속박되지 않은 몸과 마음은 날아갈 듯하였다.
그러나 가슴 한 구석에 맺힌 젊은 지식인의 회한은 지울 수가 없었다. 관서지방으로 방향을 정한 김시습은 이러한 자신의 울적한 심정을 시를 짓는 것으로 달래면서 각지를 유랑하기 시작했다.
3년여에 걸쳐 관서지방의 곳곳을 돌아본 김시습은 세조(世祖) 재위 4년(서기 1458년)에 탕유관서록(宕遊關西錄)을 쓰고 나서 관동지방으로 발길을 돌렸다. 스물여섯살에 관동지방의 유랑을 마치고 나서 탕유관동록(宕遊關東錄)을 정리한 후, 이번에는 삼남지방으로 다시 정처 없는 나그네 길을 떠났다.
스물아홉살이 되던 해에 삼남지방의 유랑을 끝낸 후 이번에도 역시 탕유호남록(宕遊湖南錄)을 지었는데, 짓고 나서 다시 문득 지난 세월을 되돌아보니 어느덧 가슴속의 회한은 희미해져 있었다. 오랜 기간의 객지 생활로 인해 몸은 많이 수척해져 있었으나,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새로이 공부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리하여 세조 재위 9년(서기 1463년)에 책을 구하기 위해 다시 한성으로 돌아왔다. 실로 오랜만에 한성에 들른 김시습은 예전에 자신을 아껴 주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을 만나게 된다.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효령대군은 조카인 세조에게 그를 적극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김시습은 세조의 불경(佛經)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조정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의 공신들이 거들먹거리는 모습을 보고 세상사가 다시 역겨워진 김시습은 경주에 있는 금오산(金烏山)으로 들어가 칩거하고 만다.
그 후 세조 재위 11년(서기 1465년) 3월에 원각사(圓覺寺) 낙성식에 참가해 달라는 효령대군의 요청을 받고 다시 한성에 올라와서 찬시(讚詩)까지 지어 주지만, 효령대군과 세조의 만류를 뿌리치고 곧바로 다시 금오산으로 돌아가 버린다. 그곳에서 김시습은 속세와 완전히 단절하고 6여년 동안 머무르면서 최초의 한문 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와 산거백영(山居百詠)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썼다. 그러는 동안 세월도 흘러 세조(世祖)와 예종(睿宗)이 연이어 죽고 어느덧 성종(成宗)이 왕위에 올랐다.
김시습은 서른일곱살 되던 성종 재위 4년(서기 1471년)에 또 다시 효령대군의 청에 의해 한성으로 돌아왔으나, 20여년 가까이 세상과 겉돌았던 그로서는 번잡한 한성 생활에 잘 적응할 수 없었다. 결국 이듬해, 성동에 집을 짓고 이름 없는 민초로서 농사를 지으며 살기로 한다. 이때 김시습의 나이는 벌써 40세 고개로 들어서고 있었으나,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천재의 가슴은 세상에 대한 분노와 역겨움만이 가득했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현실에 대한 야유로 나타나 당시의 고관대작들이 그에게 망신을 당하는 경우가 종종 잇었다. 영의정 정창손(鄭昌孫)과 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 등이 김시습에게 질타를 받았지만, 그들은 미친개에게 당한 정도로만 여기고 크게 노여워하지 않았다. 그들도 김시습의 뛰어난 능력을 인정하고 있던 터라 천재의 한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망나니같이 구는 그를 상대해 봤자 오히려 자신들의 체신만 훼손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김시습은 젊었을 때 신숙주(申叔舟)에게 많은 도움을 받아 항상 고맙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신숙주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동조하는 것을 보고 나서는 그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김시습의 재능을 아깝게 생각했던 신숙주가 한번은 술 취한 김시습을 자기 집에 재웠는데, 다음 날 김시습은 몹쓸 일을 당했다는 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한번은 서강을 지나던 김시습이 강변에 있는 정자에 한명회(韓明澮)의 시가 걸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인즉 이러했다.
'젊어서는 사직을 짊어지고, 늙어서는 강호에 눕는다[靑春扶社稷 白首臥江湖].'
이 글을 본 김시습은 실소를 금치 못하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부(扶)'자를 '망(亡)'자로, '와(臥)'자를 '오(汚)'자로 고쳐 놓았다. 이렇게 두 글자를 고쳐 놓고 나니 시의 뜻이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젊어서는 사직을 망치고, 늙어서는 강호를 더럽힌다[靑春亡社稷 白首汚江湖].'
김시습이 바라본 세상은 온통 비뚤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삭일 수 없어 기이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 시절 김시습은 책을 읽다가도 의분을 참을 수 없어 통곡하기도 했고, 시를 지어서는 마구 찢어서 던져 버리는 등 바른 정신으로는 도저히 견디지 못하여 혼이 나간 듯 살아가는 것이 당시 그의 모습이었다. 이렇게 김시습은 세상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불안정한 심신으로 10여년을 보냈다.
● 끝없는 방랑
자신을 학대하고 세상을 야유하며 마치 불자(佛者)처럼 살아가던 김시습은 47세 되던 해인 성종 재위 12년(서기 1481년)에 홀연히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그의 또 한번의 변신은 기인 같은 일생을 단면적으로 보여 준다. 어쩌면 인생의 후반에 접어들면서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초조감이 그를 세상으로 다시 나오게 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시습은 먼저 조상에게 그동안 세상을 떠돌면서 집안을 제대로 돌보지 않은 죄에 대해 용서를 빌고는 안씨(安氏) 부인을 맞아 가정을 꾸몄다. 그러나 모처럼의 가정 생활도 얼마 후 안씨가 세상을 떠나 버려 끝나고 만다. 그런 와중에 성종 재위 13년(1482년)에 폐비(廢妃) 윤씨(尹氏)에게 사약이 내려지는 것을 본 김시습은 또 다시 세상 만사가 허무하고 혐오스러워져 방랑 길에 나선다.
이번에는 특별히 친분을 주고받던 유자한(柳自漢)이 부사로 재직하고 있는 양양으로 길을 잡고 떠났다. 그러나 원체 한곳에 오래 머무르지 못했던 김시습은 얼마 안 있어 다시 길을 떠나 관동 각 지방을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 다녔다.
이렇게 평생을 바람처럼 떠돌아 다닌 김시습이었지만 일정 기간 머무는 곳에서는 반드시 밭을 개간하는 등 손수 일을 하며 지냈다. 노동을 높이 평가한 그는 자신에게 배우러 오는 제자들도 반드시 밭일을 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추악하고 가증스럽기만 한 현실에 대해서는 여전히 비판적이었던 김시습은 표리부동한 세상 인심을 비웃으며 살았다. 어려서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총명함과 학문에의 열정을 모두 묻어 버린 채, 영원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지남에 따라 회한은 조금씩 희미해져 갔지만 가슴속까지 서려오는 외로움만은 견딜 길이 없었던 김시습은 지친 몸을 이끌고 충청도 홍산에 있는 무량사(無量寺)라는 한적한 절로 찾아들었다. 김시습은 젊어서 머리를 깎고 중처럼 살았지만 불교에 완전히 귀의해서 그랬다기보다는 폭력적이고 부도덕한 세조에게 저항하는 뜻으로 그러한 행동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불가의 정신을 통해 조금이나마 젊은 날의 허무를 달랠 수 있었던 김시습은 마지막 길을 부처에게 의탁하고 싶었던지 병든 몸을 이끌고 한적한 산사로 찾아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김시습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성종(成宗) 재위 24년(서기 1493년)에 5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말년을 또 다시 방랑 생활로 보낸 끝에 낯선 사람들 품에서 최후를 맞이한 것이다.
김시습은 죽기 전에 화장을 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관을 절 근처에 안치했다가 3년 후에 정사를 지내려고 관을 열어 보니 시신이 썩지 않고 그대로였으며, 얼굴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평온해 보였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승려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생각하여 시체를 화장하고 사리를 보관하는 돌탑을 세워 그 뼈를 거두었다.
어려서부터 천재로 불렸으며 10대에는 자신의 존재조차 잊어버릴 정도로 학문에 몰두하다가 20대에는 세상을 한탄하며 천하를 떠돌아다닌 김시습은 잠시 세상으로 돌아왔으나 현실을 비판하며 사색과 수도에만 정진하다가, 50대에 이르러 초연히 속박의 허울을 벗고 자연으로 돌아간 고독한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 김시습의 사상적 바탕
김시습은 이색(李穡)의 학통을 이어받았으며, 만물의 생성과 변화를 음양에 의해 설명하는 태극설(太極說)을 주장했다. 즉, 우주만물이 조화하는 근원을 태극(太極)이라 하고, 사물의 현살을 포괄하는 음양(陰陽)에 의해 만물이 생성되고 변화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음양에 의해 사물의 사상(四象)과 팔괘(八卦)가 만들어지고, 이들이 다시 오행(五行)에 의해 만물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음양은 결국 하나의 본질을 양면으로 바라본 이원론적 관점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만물의 근원이자 우주의 본체인 태극을 그 존재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이라고 인식하였기 때문에, 그의 사상에는 도교적인 성향이 들어가 있기도 하다. 또한 우주 전체가 하나의 태극이지만 만물 모두에도 태극이 깃들여 있으므로 하늘, 땅, 사람의 삼재(三才)가 서로 상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천인상감설(天人相感說)의 기초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태극은 만물의 근본 이치로서 변할 수 없는 도리이기 때문에 태초부터 영원까지 바뀌지 않는 가치였으며, 김시습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하여 현실과 타협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에게 있어서 세조는 인간의 도리를 거스른 존재로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김시습은 불의에 맞서 사육신(死六臣)처럼 목숨을 걸고 항거하지는 않았다. 다만 당시 권력층의 요청을 완강히 거절하고 세상을 버린 채 방랑하며, 사람들이 보기에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았을 뿐이다. 적극적으로 투쟁하지도 않으면서 현실을 등진 채 자학하며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김시습은 금오신화의 주인공을 통해 대신 답변을 보냈다.
금오신화(金鰲新話)에는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남엽부주지(南炎浮洲志),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등 다섯 편의 소설이 실려 있다. 이들 작품의 주인공들은 한결같이 질곡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 인습의 굴레를 던져 버리고 영원히 꺼지지 않는 영생의 세계로 나래를 펴고 들어간다. 이는 바로 김시습의 삶의 자세를 대변한 것으로, 번민과 고통 속에서 그가 결정한 선택을 보여주고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신이 삶을 포기하고 내동댕이쳐 버린 것으로 비쳐지지만, 그로서는 스스로 의지를 갖고 선택한 삶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생규장전은 단순히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설 같지만, 자세히 보면 두가지 상반된 주제로 대비되어 있다. 전반부의 내용은 이생의 아내가 도적에게 살해당하는 것으로, 사랑이 타의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묘사하였다. 후반부에서는 이생이 환생한 아내와 만나 3년 동안 꿈 같은 세월을 보내지만, 아내와 다시 이별하게 되자 그 길로 병들어 죽고 만다는 내용으로, 전반부의 주제는 말 그대로 타의에 의한 '비참함'이지만, 후반부의 주제는 자신의 의지에 의해 선택된 '비참함'이다.
간단히 생각하면 둘 다 결말이 비극적이므로 다를 게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남에 의해 주어진 것'과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 김시습의 생각이다. 살아 있는 줄 알았던 아내가 사실은 죽은 것이라는 사실이 더 큰 고통이었지만, 그 결말은 자신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결국 김시습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삶의 의미와 중요성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김시습이 스스로의 의지를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가 또 하나 있다. 30대 후반에 상경하여 성동에서 농사짓고 살던 때의 일이다. 김시습이 경작하던 전답을 어떤 권력 있는 자의 끄나풀이 배앗아 가 버렸는데, 김시습은 모른 체하고 상대방이 농사를 다 지을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다가, 추수월 무렵에 갑자기 찾아가서 땅을 내놓으라고 졸 라댔다. 그러나 상대방이 이에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으므로 그 일은 소송으로까지 번지게 되었다. 소송의 결과는 원래부터 떳떳한데다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입장을 설명한 김시습의 승리로 끝났다.
그런데 승소 문서를 받아 가지고 나오던 김시습은 크게 한번 허탈한 웃음을 날려 보내고는 문서를 갈기갈기 찢어 개울 속에 처박아 버렸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세상을 비웃고 못된 인간들을 희롱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타인에 의해 휘둘려지는 삶을 용납하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 불교와의 관계
김시습은 생애의 대부분을 머리를 깎고 승려 행세를 했다. 하지만 화장하는 것을 거부하고 매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이 점에서 불교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 "부처를 섬기되 먼저 인애로써 중생을 편안히 하는 것이 그 근본이고, 법을 찾더라도 무엇보다 그 지혜를 배워서 일의 도리를 깨닫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설파한 것에서도 그가 불교를 따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김시습은 결코 신실한 불교 신자가 되려 했다기보다는 유학자로 평가받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사상적 뿌리는 어디까지나 성리학에 있었던 것이다. 김시습이 "불승(佛僧)은 정치에 관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게 된 근저에도 그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이 점은 그 후 유학자들이 김시습을 조선 성리학의 사종(師宗)으로 추앙하는 점에서 명백히 증명되고 있다. 결국 그에게 있어서 불교는 외양이었고 내면은 여전히 성리학이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 김시습의 내면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성현이 가르치는 참된 길을 버리고 이단의 길을 가는 말종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대하여 김시습은 이렇게 대응했다.
"논어나 맹자도 결국은 옛 사람들이 전해 준 것일 뿐이다. 참된 진리란 실제 생활 소에서 실천을 통하여 찾아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라도 ?片?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설사 성현의 가르침이라도 헛된 일이다."
이렇듯 김시습은 척불숭유(斥佛崇儒)의 획일적인 정신 구조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학문적 포용력을 발휘한 열린 사고의 소유자였으며, 자신의 생각을 단호하게 실천하며 살아간 신념가이기도 했다. 그는 성리학을 자신의 이념으로 삼았지만, 천년 이상을 민족의 신앙으로 자리잡아 온 불겨의 전통적인 도가 사상까지 포괄하여 그것들이 만나는 지점을 찾고자 노력하였다. 현실에 대해서는 극히 비판적이고 냉소적이었던 그가 학문에 있어서는 오히려 개방적인 포용력을 발휘한 셈이다.
김시습의 학문적 기상은 서경덕의 기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율곡에 이르러 주기론으로 완성되었다. 김시습처럼 한때 출가하였다는 의심을 받던 율곡이 김시습전(金時習傳)을 지어서 그의 행적을 세상에 널리 알린 후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면모가 재평가되기도 했다.
● 김시습은 실패한 지식인인가?
김시습은 세조의 왕위 찬탈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김시습의 인생 행로가 바뀌어 버린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전혀 현실에 적응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원체 꼿꼿한 성미를 가진 김시습은 부정한 무리들이 정권을 차고 앉아 위세를 자랑하는 모습을 견뎌내지 못했다. 권력의 이면에서 벌어지는 추악한 현실에 정나미가 떨어져 버린 것이다. 게다가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불렸고, 스스로도 높은 이상을 가지고 있었던 그였기에 세상에 대한 혐오와 분노는 클 수밖에 없었다.
세상을 떠돌면서 감정의 불은 겨우 가라앉힐 수 있었지만 다시 돌아온 현실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젊어서는 자신의 상대로도 여기지 않았던 하찮은 인물들이 온갖 부귀 영화를 독차지하고 있는데, 자신은 겨우 몇 두렁의 땅을 얻어 간신히 연명해야 하는 불공평한 세상일이 한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때를 놓친 인간의 푸념'이라고만 매도할 수는 없다. 김시습은 그 '때'라는 것을 자기 자신의 의지로 던져 버렸기 때문에 아쉬움이나 미련은 없었다. 다만 부당한 현실이 역겨웠고, 자신의 높은 꿈을 세상에 펼쳐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사실이 고통스러웠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김시습의 탈속적인 삶이 반드시 실패한 것이라고 얘기할 수는 없다.
사림의 등장 이후 조선에서는 부당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은 김시습과 같은 인간상을 바람직한 모습으로 인정하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변신과 적응에 능한 인물보다는 자기가 배운 원칙에 충실한 인간형이 더욱 필요한 것이다.
김시습은 현실을 거부하고 비판과 야유를 보냈지만, 삶 전체를 그것만으로 소모시키지는 않았다. 성리학의 새로운 체계를 세워서 16세기 이후 발전하게 되는 조선 성리학의 토대를 만들었으며, 고대 소설을 개척하여 문학사에 끼친 공적도 대단히 크다. 무엇보다도 김시습은 자신이 배운 학문과 도리를 실제의 삶에서 그대로 실천한 신념의 인간이었으며, 진리 탐구에 있어서는 포괄적 시각을 가진 '학문적 자유주의자'였다.
참고서적
김형광 '인물로 보는 조선사' 시아출판사 2002년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시아출판사 2003년
김용만 '인물로 보는 고구려사' 창해 2001년
황원갑 '민족사를 바꾼 무인들' 인디북 2004년
이덕일 '고구려 700년의 수수께기' 대산출판사 2000년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 휴머니스트 2003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들녘 2000년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들녘 2000년
김기홍 '천년의 왕국 신라' 창작과비평사 2000년
박선식 '한민족 대외 정벌기' 청년정신 2000년
이도학 '백제 장군 흑치상지 평전' 주류성 1996년
송기호 '발해를 찾아서' 솔출판사 1993년
윤병식 '의병항쟁과 항일 독립전쟁'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6년
한시준 '임시정부 활동과 의열투쟁의 전개'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8년
장세윤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솔출판사 2001년
{이상}
'종합자료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100년전 타이타닉호 실제 영상<현존 최고화질> (0) | 2010.01.28 |
---|---|
[스크랩] 추석과 관련된 자료 (0) | 2010.01.28 |
[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1.조선 최고의 사상가. 성리학의 대부 퇴계(退溪) 이황(李滉) (0) | 2010.01.26 |
[스크랩] 31. 관동속별곡(조우인) (0) | 2010.01.24 |
[스크랩] [역사의 땅, 사상의 고향](15) 실학적 역사학 창시 한백겸(上) (0) | 2010.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