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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의 역사 인물」49.민생(民生) 안정을 최우선과제로 삼은 반듯한 정치인 김육(金堉)

회기로 2010. 1. 26. 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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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金堉)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는 연이은 전란으로 전 국토가 짓밟히고 백성들의 생활이 극도로 피폐했던 시절을 살면서 오로지 백성을 잘 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데 평생을 바친 의지의 정치인이다. 이를 위해 그는 허황된 정신 세계에 몰두하는 학문보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그는 항상 자신의 생각을 강하게 주장했지만, 이는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통받는 백성들 편에 서서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려 한 것이었다. 실제로 김육은 평생을 청빈하게 살았다. 이런 이유로 반대파들조차 그를 무작정 매도하지 못했다. 김육이 파란과 굴곡이 난무하는 정치판에서 귀양 한번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반듯한 삶의 자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김육의 정치 철학의 근본은 오로지 백성을 위하는데 있었고, 이를 위해 특권층의 철폐를 주장했는데, 부의 편제가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할 뿐 아니라 나라도 위태롭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김육의 생각은 다음과 같은 그의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세상에서 제일 두려운 것은 하늘, 외적, 백성 세가지이다. 그 중에서 가장 가까운 데 있는 백성을 안정시킨다면, 멀리 있는 다른 두가지 두려움을 자연히 해소될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의 몇 안 되는 경제 전문가이자 과학 연구자였으며, 실천적 학문을 추구하여 훗날 유형원(柳馨遠)에게 이어진 실학 사상의 문을 열어 놓았다.

● 정인홍(鄭仁弘)의 미움을 사다.

김육은 1580년에 한성의 마포에서 재랑 김흥우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고조부 김식은 중종(中宗)대에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해 죽음을 맞은 사람 중 한명이었다.

김육은 열두살 때 이미 소학(小學)을 통달할 정도로 총명했으며, 몸가짐이 단정했고 말수도 많지 않았다.

열세살 되던 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가족과 함께 해주로 피난을 갔는데, 그곳에서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아 졸지에 어머니를 도와 할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보살펴야 하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피난 중에 성혼(成渾)이라는 훌륭한 스승을 만나 학문의 진보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받기도 했다.

열아홉살 때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황해도 연안으로 피난하였는데, 그 해에 할머니가 죽었고 이듬해에는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났다. 전쟁은 그에게 생활의 고통과 함께 육친과의 이별까지 안겨 준 것이다. 그러나 김육은 어린 나이에도 꿋꿋하게 장례 절차를 마친 후, 아버지의 묘를 이장시켜 부모를 남양주 미금 땅에 합장하기까지 하였다. 그가 얼마나 강인한 성품을 지녔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그 후 김육은 한성으로 돌아와서 이모부댁에 의지하고 살다가 스물다섯살 되던 해에 윤급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혼인을 했다. 그러고 나서 이듬해인 1605년에는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해서 합격하였다. 그 후 성균관(成均館)에서 공부하다가 1611년에 문묘종사(文廟宗社)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문묘종사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옛 선현들의 위패를 모시는 것으로서, 그는 이때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5명을 문묘종사하자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북인 정권의 실권자인 정인홍(鄭仁弘)이 이를 반대하면서 이황을 심하게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당시 정인홍은 문묘종사의 대상이 되기에 이황의 학문과 행적이 불분명하다는 주장을 폈으나, 사실은 퇴계학파와 쌍벽을 이루는 조식(曺植)도 이황과 마찬가지로 문묘종사하게 해 달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성균관과 중앙 정계를 구성하던 사람들은 대부분 퇴계학파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존경하는 스승을 폄하는 말을 한 정인홍에게 화가 난 김육은 성균관 학생들과 함께 유학자 명부인 정금록(正今錄)에서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해 버렸다.

그러나 정인홍은 광해군(光海君)이 왕위를 계승하는데 큰 공을 세운 대북파의 거두였고, 이 사건은 당시 권력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광해군과 정권 실세들을 자극했다. 결국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은 그 자리에서 모두 쫓겨나고 말았다. 성균관에서 좇겨난다는 것은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박탈되어 관직으로 나가는 길이 막혀 버리는 것을 뜻한다.

그 후에도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탄압이 연이어 일어나자, 김육은 서른다섯살 되던 해인 1614년에 가족들을 데리고 경기도 가평군 잠곡으로 들어가 칩거해 버렸다. 잠곡에서 김육은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하는 등 일반 농민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민본주의의 사상적 터를 닦았으며, 호를 회정당(晦靜當)에서 잠곡(潛谷)으로 바꾸기까지 했다.

● 지방관 생활 중에 알게 된 백성들의 현실

김육이 잠곡에 운둔하며 조용히 살고 있는 동안 세상은 또 한 번 바뀌고 있었다. 1623년에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난 것이다.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광해군(光海君)대에 박해를 받았던 인사들을 다시 조정에 불러 들였는데, 이때 김육도 부름을 받아 의금부 도사직으로 임명되었다. 잠곡으로 들어간 지 10년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관직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죄인 압송 과정에 문제가 생겨 파직당하고 만다.

김육이 파직당한 다음 해, 정변(政變)에 공로가 컸지만 낮은 보상을 받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군이 한성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까지 피난을 가게 되었는데, 이때 김육은 피난 가는 국왕을 따라가서 극진히 봉양했다. 반란이 평정되자 그 공으로 김육은 음성현감에 임명되었고, 그 해 9월에는 중광별시(重光別試)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고위직 진출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김육이 현감으로 있을 당시, 음성 고을은 매우 피폐해져 있었다. 백성들은 수탈을 견디다 못해 모두 여기저기 흩어져 버린 상태였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고, 버려진 논밭은 잡초들로 무성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현실을 목격한 김육은 잘못된 폐단을 고치자면서 음성현진패소(陰城縣陳弊疏)라는 상소를 올렸다. 현실과 동떨어진 세금과 요역의 징발이 백성들을 괴롭히고 있으므로 이를 감해 줄 것과, 이웃 충주가 관할하기 어려운 죽산과 진천을 음성현으로 포함시켜 달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김육의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는 음성현감으로 재직한 지 1년도 채 못되어 중앙으로 불려 올라와 사간원 정언, 병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이듬해에 사간원 헌납을 거켜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그때에 백성들의 인적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호패청이 신설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폐단만 늘자, 김육은 이것의 폐지를 건의하여 관철시키기도 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서기 1627년) 이듬해에는 홍문관으로 자리를 옮겨 여러 관직을 역임하다가 1632년에 53세의 나이로 사간원의 종3품 벼슬인 사간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1636년 3월에는 동지사로 명나라의 연경에 갔었는데, 그곳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침입으로 패전국(敗戰國)이 되어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기도 했다.

이듬해 6월, 1년만에 귀국한 김육은 잠시 쉬다가 충청감사에 임명되어 충청도에 가 보니 전쟁을 겪고 난 후라 백성들의 생활은 예전보다도 더 피폐해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더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공물(貢物)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김육은 그 유명한 '대동법(大同法)'을 본격적으로 시행하자고 주장한다.

대동법이란 물픔으로 내던 공물을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의 면적에 따라 쌀이나 무명 등으로 대신하여 내는 제도를 말하는데, 광해군(光海君) 때 이미 경기 일부 지역에서 시범적으로 실시하였고, 인조(仁祖)대에는 강원도까지 확대 실시하고 있었다. 김육은 대동법의 정당성과 유용성이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도 실시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는 것이 나라의 이익과 백성들의 복리를 위하여 가장 타당한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김육은 주장의 근거를 확보하기 위해 충청도의 경작지 면적과 관청에 필요한 경비를 실제로 조사하여, 대동법이 실시되면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줄어든다는 구체적인 증거와 함께 계산까지 뽑아서 재차 건의를 올렸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대동법이 실시되면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어 엄청난 부담을 안게 될 것이 뻔한 고위 관리들과 권문세가들이 완강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결국 김육은 대동법 실시를 실현시키지 못한 채, 1년여의 임기를 마치고 동부승지가 되어 중앙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그렇지만 그 후에도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다.

● 중앙 정계에서의 활동

중앙 정계로 돌아온 김육(金堉)은 형조참의 겸 대사성, 홍문관 부제학, 사간원 대사간, 한성부 우윤 등을 거쳐 1643년에 64세의 나이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도승지에 임명된 해에 왕세손의 교육을 담당하는 보양관이 되어 선양에 다녀와서는 대사성, 이조참판, 병조판서, 우참찬, 대사헌, 관상감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646년에는 우의정 이경석(李景奭), 서장관 유심(劉心) 등과 함께 또 한번 연경에 다녀왔다. 돌아와서는 68세의 나이에 개성유수로 발령을 받았고, 70세가 되던 해인 1649년에 인조(仁祖)가 죽자 국장(國葬)을 책임지고 수행하기도 했다.

국장을 마치고 효종(孝宗)이 왕위에 오른 후, 김육은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어 마침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나이가 많다는 것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재차 사임을 요청하면서 대동법(大同法) 실시를 다시금 건의하였다. 이때 대동법 실시에 따른 나라의 이해득실에 관한 생각의 차이로 김집(金集)과 첨예하게 대립하다가 우의정을 사직하고 양주로 내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효종은 그를 다시 영중추부사로 불러들이고, 이어서 다음 해에는 영의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육이 계속해서 사임을 고집하자 효종은 "지금 청나라에서 보낸 사절이 곧 도착하는데, 조정 안에 대신들을 이끄는 웃어른이 없는 상태에서 그들을 맞아들일 수는 없지 않은가? 정 사직하려면 그들이 가고 난 다음에 하라."며 그를 달랬다. 효종이 이렇게까지 나오자 김육은 할 수 없이 관직에 남아 청나라의 사신 일행을 영접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으나 사신이 떠나자마자 또 다시 사직을 청하였다.

평소에 김육은 70세가 넘으면 생각에 한계가 오기 때문에 후배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거듭 물러나기를 간청한 것인데,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안 된 효종은 김육과 같이 경험이 많은 노재상이 필요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계속 그를 붙들었던 것이다. 결국 김육은 효종의 뜻을 뿌리칠 수 없어서 잠시나마 조정에 더 남아 있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1651년 8월에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고, 그 해 11월에는 둘째 아들 우명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정되어 김육에게 있어서 굉장히 의미 있는 한 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 해 12월, 건강이 나빠진 김육은 영의정의 자리를 정태화(鄭太和)에게 물려주고 우의정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듬해 3월에 좌의정이 되었다. 그 다음해에는 이경여(李敬與), 이후원(李厚源), 채유후(蔡裕後) 등과 더불어 인조실록(仁祖實錄) 50권을 편찬하였으며, 1654년 6월에 다시 영의정으로 임명되었다. 그때 그의 나이 이미 75세로 물러날 기회만 기다리던 노인에게 조정 대신들을 이끄는 영의정이란 자리는 너무나 벅찼다. 때문에 임명된 지 2개월 후에 곧 사임했으나 이듬해 7월에 다시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의 요청에 따라 행전법(行錢法)의 조항들이 제정되기도 했다. 이것은 화폐유통이 추진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그에 따라 상평청(常平廳)에 새로 관직을 만들고 이를 주관하게 했다. 또 그 해에는 맏아들 좌명이 대사간이 되어서 부자가 함께 당상관(堂上官)에 재직하는 영광을 얻기도 했다.

김육은 1657년에 선조실록(宣祖實錄)을 고쳐서 다시 내고, 전라도에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두 번이나 올리는 등 관직 생활 내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즐기차게 추진했다. 그의 이런 노력에 의하여 대동법이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나마 실시될 수 있었다.

그러나 김육은 평생의 숙원이었던 대동법의 전국적인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그 이듬해 9월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렇지만 훗날 그의 아들 좌명이 아버지의 간절한 뜻을 이어받아 1662년에 전라감사를 자청하여 나가서는 전라도 전 지역에 걸쳐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 대동법(大同法) 시행의 의미

김육에 의하여 추진된 대동법(大同法)은 공납(貢納)을 대신하여 시행된 조세제도이다. 왜 그가 그토록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대동법 시행을 주장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공납에 의한 폐단을 이해해야 한다. 공납은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백성들에게 부과하여 납부하게 하는 세금 제도로서, 가짓수도 많거니와 필요할 때마다 수시로 부과되었기 때문에 백성들로서는 가장 부담이 컸다. 더구나 그 지방에서 나지도 않는 물건을 납부하라고 요구하기도 하고, 부가 기준도 고을의 크기와 상관없이 동일하였다. 빈부를 다지지 않고 징수되었음을 물론, 각 호(戶) 단위로 부과되어 도리어 빈민들이 부호들보다 세금을 더 내는 형국이었다.

거기에다 그 지역에서 구하기 힘든 물품을 대신 납부해 주고 수수료를 받는 방납(防納) 제도가 도입된 이래, 공물을 심사하는 관리와 방납업자의 농간으로 백성들은 물품의 실제 가격보다 몇 배 높은 값을 치러야 했다. 이에 대한 부담을 견디다 못한 백성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농지는 경작할 사람이 없으니 자연 황폐해졌다. 이에 다라 국가 재정도 궁핍해질 수밖에 없었다. 사태가 이 지경인데도 일부 기득권층의 이익을 위해 악법이 계속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폐단을 고치고자 김육이 줄기차게 주장한 대동법은 어떻게 보면 간단히 시행할 수 있는 법 체계였다. 즉, 소유한 토지를 기준으로 하여 물품이 아닌 쌀과 무명으로 내게 하자는 것이었다. 일찍이 조광조가 그 시행을 제기한 이래 이율곡 등 여러 사람이 주장했으나 도입되지 못하고 100년 이상 끌어온 까닭은, 대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고위 관리들이 방해했기 때문이다. 대동법이 경기도에 처음 도입된 이후 강원도에만 확대 실시된 것도, 곡창지가 많은 남부 지방에 비해 관료 지주들이 소유한 토지가 적었던 관계로 시행에 대한 반대가 극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효종(孝宗) 재위 원년에 김육(金堉)의 상소로 촉발된 대동법 논쟁으로 당시 조정은 완전히 둘로 갈라져 버렸다. 반대론의 선두에 선 인물은 이조판서 김집(金集)이었다. 김집은 이율곡(李栗谷)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의 제자로서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 당대의 뛰어난 직계 제자들을 거느리고 있던 서인의 우두머리였다. 결국 대동법 시행을 둘러싸고 집권 세력인 서인은 대동법을 찬성하는 한당(漢黨)과 반대하는 산당(山黨)으로 파를 나누어 갈등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명분이나 현실적 필요에 의해 어찌할 수 없는 대세였다. 따라서 효종(孝宗)대에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대 실시한 이후 현종(顯宗) 재위 7년(서기 1666년)에 함경도에서, 숙종(肅宗) 재위 3년(서기 1677년)에 경상도에서, 숙종 재위 34년(서기 1708년)에 황해도에서 실시되었다. 광해군(光海君)이 즉위한 해(서기 1608년)에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된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되기까지 꼭 100년이 걸린 셈이다.

전국 각지에서 대동법이 실시될 때 그 기준이 되었던 자료는 김육이 충청도 감사로 있던 시절에 제출했던 대동사목(大同事目)이었다. 그리고 과세기준은 전국적으로 시행되면서 1결당 12말로 통일되었다. 대동법의 시행으로 부호의 부담은 늘고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은 줄었으며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했다. 결과적으로 사회 안정에 큰 역할을 한 셈이었다.

대동법으로 인해 변화된 사회 현상은 또 있다. 그것은 조정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구매하여 공급하는 공인(貢人)의 등장이었다. 공인의 등장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후 초기 산업 자본가로 발전한 공인들은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하였다.

김육이 평생을 걸고 추진한 대동법은 조선 사회에 일대 변화를 가져온 셈인데, 그의 이러한 끈질긴 노력은 어린 나이부터 한 집안의 가장 노릇을 하며 겪은 경험과 잠곡에서의 생활이 바탕이 된 것이다.

김육은 소학(小學)의 가언(假言) 편에 나오는 송나라의 성리학자 정호(程顥)의 '관직에 나간 사람이 만물을 아끼는 마음을 가진다면 반드시 사람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을 것이다.'는 명언을 가슴 깊숙이 담아 두었다가 실행에 옮긴 사람으로서 정호의 '애물제인(愛物濟人)' 사상은 김육의 삶에 있어 일관되게 유지된 철학이라 할 수 있겠다.

● 그 밖의 개혁 조치

김육은 대동법 실시 이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우선 거론할 수 있는 것이 역법(曆法)의 개정이다. 조선은 세종(世宗)대에 만들어진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을 300년에 걸쳐 사용하고 있었는데, 실제 절기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어서 농업활동에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예수회 소속 선교사 샬 폰 벨이 서양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고안한 시헌력(時憲曆)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에 1645년에 관상감 제조로 있던 김육은 중국에서 가져온 신력효식(新曆效植)이라는 신역법에 관한 책을 연구하여 조선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이 난해하여 이해하기 어렵자, 중국에 가는 사신들에 천문과 관련된 일을 맡은 일관(日官)을 대동시켜 역법을 배워 오게 했다. 그리하여 1653년에는 조선에 맞는 시헌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 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1896년에 태양력을 사용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또 김육은 수차(水車)를 이용한 농사법을 제안했다. 그때까지는 일일이 사람이 퍼 올리는 원시적인 방법에 의존하여 밭에 물을 대고 있었는데 김육이 제안한 중국식 수차는 이러한 노력을 대폭 줄여 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김육은 하천을 정비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또한 김육의 제안 중에는 교통 및 운송 방법에 있어서 수레를 이용하자는 획기적인 제안도 있었다. 당시에는 운송 수단으로 말을 이용했는데 말은 보살피기도 힘들뿐더러 한꺼번에 많은 짐과 사람을 실어나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한 김육은 화폐 주조 기술을 이용하여 활자를 만들어서 많은 서적을 인쇄해 내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두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많은 책이 소실되는 바람에 책 부족 시대는 매우 심각했는데도, 활자 제조와 서적의 인쇄에 대한 책임을 맡은 교서관(校書館)이 완전히 그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에 새로운 책을 찍어 내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그나마 필요한 책은 목활자를 만들어서 간신히 찍어 내고 있었다. 이에 김육은 교서관에 예산을 지원하여 다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조처하여 1656년에 만병회춘(萬病回春) 10권, 그 이듬해에는 정유식년 사마방목(司馬榜目)을 인쇄했다. 1658년에는 삼대가 시전집 10권을 찍어 내서 학문의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특히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금속 합금에 대한 많은 지식을 쌓은 김육의 영향으로 그의 집안은 아들 좌명과 손자 석주에 이르기까지 활자에 대하여 남다른 관심을 가졌는데, 이에 따라 1668년에는 아들 좌명이 구리를 재료로 한 '삼주갑인자(三鑄甲寅字)'를 만들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찍어 냈고, 숙종 때에는 손자인 석주가 한구자(韓構字)를 만들어 많은 서적을 인쇄했다.

그리고 안전한 조운(漕運)을 위하여 '체재(替載)' 방식의 도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방법은 태안반도 근처의 섬들에 창고를 지어 놓아 싣고 온 화물을 인단 내려놓게 한 후 육지까지는 작은 배로 운반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남부 지방에서 조정에 바치는 쌀들은 주로 서해안을 따라 배로 운송되었는데, 서해안은 조차가 심하고 암초가 많기 때문에 배들이 파손되기 일쑤여서 이러한 방법을 제안한 것이다.

이렇듯 김육에 의해서 제안되고 만들어진 모든 제도는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위한 마음에서 비롯되었다. 김육은 현실의 잘못된 제도와 정치로 인해 백성들이 겪는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을 어려서부터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고향에 있을 때는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에 종사했고, 관직에 나가서는 백성들의 궁핍을 구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스스로의 생활에 있어서 항상 엄격하고 철저하였으며 검소하고 청빈했던 김육은 평생 유기로 만든 그릇 대신 목기 그릇을 사용했으며, 우의정이 된 71세까지도 한성에 집 한 칸 없이 셋집에서 살았다고 한다. 비쁜 공무 중에도 학문에 정진하였음은 물론, 잠곡집(潛谷集),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유원총보(類苑叢寶), 기묘록(己卯錄), 구황촬요(救荒撮要) 등 다양한 저술을 남겼다. 항상 단정한 몸가짐을 잃지 않고 살아간 김육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물러서지 않는 강인한 의지의 인물이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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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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