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역사에서 빼어난 전공(戰功)을 세워 이름을 남긴 명장들 가운데는 죽은 뒤에 신장(神將)이 되어 민중의 신앙 대상이 된 인물이 많은데, 예를 들면 신라의 장보고(張保皐)와 고려 말기의 최영(崔瑩) 장군, 그리고 조선왕조 때의 임경업(林慶業) 장군 등이 있다.
임경업 장군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굳건히 지켜 압록강을 건너온 청황(淸皇) 태종(太宗)의 10만 대군도 피해서 갈 정도의 용장이었고 지장이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을 완전히 석권하지 위해 조선에 원병(援兵)을 강요하자 임경업 장군은 조정의 명령에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명나라 군사들과 거짓 싸움을 벌이다가 명군과 내통한 것이 드러나 청나라 군사들에게 붙잡혔다. 끌려가는 도중 탈출한 임경업 장군은 이번에는 명나라를 위해 청군과 싸우다가 포로가 되었다.
청나라 조정은 그의 인품과 재주가 아까워 온갖 협박과 회유를 했지만 임경업은 지조를 지켜 끝끝내 항복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 조정의 요청에 따라 본국으로 송환된 일세의 영웅 임경업 장군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리고, 그것도 모자라 당시 정계의 실세요, 친청파(親淸派)의 거두인 김자점(金自點)의 음모에 걸려 안타깝게도 비명에 가고 말았다.
용맹과 지략이 남달리 뛰어났던 임경업 장군은 나라에 대한 충성을 다했건만 이렇게 때를 잘못 만나 말년에는 조선에서 청으로, 청에서 명으로, 다시 명에서 청으로, 또 다시 청에서 조선으로 끌려다니며 국제적 미아가 되다시피 하다가 살해당하는 비극적 일생을 보냈다. 그는 그렇게 시운을 잘못 타고나 아까운 한 목숨을 빼앗겼지만, 이 땅의 서민 대중의 가슴속에 불멸의 영웅신으로 살아남아 오래도록 추앙받고 있다.
● 때를 잘못 만나 국제적 미아가 된 비운의 장수
전국 여러 곳의 신당에서 임경업 장군을 영험 높은 신장(神將)으로 모시고 있고, 그의 비극적인 일생은 소설로도 전해지고 있다. 임경업 장군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한글본 임장군전(林將軍傳)이 있고, 한문본 임경업전(林慶業傳)이 있다. 임장군전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전쟁영웅 소설로서 작자와 저작 연대는 미상이다. 현재 전해오는 이른바 경판은 고종(高宗) 재위 12년(1875년)에 21장짜리로 나온 방각본(坊刻本)이다. 방각본이란 장사를 목적으로 상점에서 판각한 소설을 가리킨다. 임장군전이나 임경업전이나 모두 병자호란 때의 전쟁영웅인 임경업 장군의 일대기를 전설화하여 엮은 소설이다. 또 작자 미상의 박씨부인전(朴氏夫人傳)에도 임경업 장군이 등장한다.
한편, 정조(正祖) 재위 15년(서기 1791년)에는 왕명으로 임경업 장군의 사적을 기록한 임충민공실기(林忠愍公實記)가 편찬된 바 있다. 5권 2책의 임충민공실기는 제1권에 어제서(御祭書), 제문(祭文), 유문(遺文) 등이, 제2, 3권에 임경업 장군의 연보가, 제4권에 사제문(賜祭文), 전(傳), 후서발부(後敍跋附) 등이, 제5권에는 행장(行章), 시장(詩章), 신도비문(神道碑文), 사장(事章), 봉제문(奉祭文), 청액소(請額疏), 영건통문(營建通文) 및 아들 임중번의 상언 등이 각각 실려 있다.
● 소년 시절부터 의협심과 담력이 뛰어났던 장수감
임경업(林慶業) 장군은 선조(宣祖) 재위 27년(서기 1594년)에 충북 충주 탄금대 근처 대림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시호는 충민공(忠愍公)이다. 그가 태어날 부?L 그의 가세는 몹시 곤궁했던 모양이다.
평택(平澤) 임씨(林氏) 충민공파보(忠愍公派報)에 따르면 임경업의 8대조 임정(林整)이 예조판서를 지냈고, 6대조 임수창(林壽昌)은 예조참판을, 5대조 임규(林珪)는 대제학을 지냈으나 고조부 임정수(林廷樹)가 진사를 한 뒤로는 벼슬길에 나선 사람이 없다.
임경업은 아버지 임황(林篁)과 어머니 파평(坡平) 윤씨(尹氏) 사이에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위로는 성업(成業), 승업(承業), 형업(亨業) 세 형이 있었고, 아래로는 사업(詞業), 준업(俊業), 홍업(弘業), 흥업(興業) 등 네 아우가 있었다.
임경업은 소년 시절부터 의협심이 뛰어나고 담력이 강해 하늘이 내린 장수감이란 소리를 들었다. 마을 아이들과 더불어 놀 때도 꼭 군사놀이를 했으며 자신이 원수 노릇을 했다. 또 속리산 경업대와 입석대는 그가 소년 시절에 심신을 단련하던 곳이라고 전한다.
또 일찍부터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했는데 주위의 누구도 그를 당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는 이런 일도 있었다. 임경업이 아이들을 데리고 여전히 대장이 되어 군사놀이를 하고 있었다. 들판에 지게를 나란히 세워 놓고 진으로 삼아 군사놀이를 하는데 아무도 그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다. 그때 충청도에서 경상도 지방으로 전임되어 가던 한 벼슬아치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가소롭다며 임경업을 불러 당장 군사놀이를 걷어치우라고 꾸짖었다. 그러자 임경업이 의연한 표정으로 '진영'을 지키면서 단호한 목소리로 "진영은 함부로 부술 수 없는 것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소년 임경업의 호기가 대견했던지 그 관리는 그대로 가던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그는 또 글을 배운 뒤부터는 '대장부(大丈夫)'라는 석자를 종이에 써서 늘 품에 간직하고 다녔다고도 전한다. 하지만 임경업의 꿈은 장수가 되는 것이었으므로 소년 시절부터 글공부보다는 군사놀이며 말 달리고 활을 쏘는 연습에 더욱 열심이었다. 그래서 책을 읽어도 공자왈 맹자왈 하는 유학의 서적보다는 손자(孫子)나 오자(伍子) 같은 무경칠서(武經七書), 즉 병법서들을 밤을 새며 읽었다.
● 입지전적 무장 정충신(鄭忠信) 휘하에서 전공 세워
그렇게 하여 임경업은 광해군(光海君) 재위 10년(서기 1618년) 무과에 급제하여 꿈에 그리던 무관(武官)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나이 25세 때였다. 이후 소농보권관과 첨지중추부사 등을 거쳐 정충신(鄭忠信)의 부관으로 근무했다. 당시 임경업의 상관인 정충신은 입지전적 인물이었다. 선조(宣祖) 재위 9년(서기 1576년)에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정충신은 선조 재위 25년(서기 1592년)에 무과에 급제했고, 광해군 재위 13년(서기 1621년)에 만포첨사로 국경을 경비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인조(仁祖) 재위 1년(서기 1623년)에는 안주목사로 승진하여 방어사를 겸했고, 그 이듬해에 이괄(李适)의 반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전부대장으로 이괄의 군대를 무찔러 전무공신 1등이 되고 금남군에 봉해졌으며, 이어서 평안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영변배도호부사를 겸했다. 임경업 장군은 바로 이 이괄의 반란 때에 정충신 장군의 선봉장으로 큰 공을 세웠던 것이다.
정충신은 인조 재위 5년(서기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고, 그 뒤 포도대장, 경상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했다. 그는 청렴한 무인이었으며, 군사는 물론 천문, 지리, 의술, 점술에도 능통했다고 한다. 하지만 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정충신이 이처럼 무장으로 입신출세하고, 인조 재위 14년(서기 1636년)에 61세로 편안히 임종할 수 있었던 데에는 뛰어난 담력과 총기를 타고난 덕분이었다.
정충신의 출세길을 열어준 사람은 권율(權慄)과 이항복(李恒福)이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정충신은 겨우 17세였다. 당시 광주목사 권율이 의주까지 달려가 선조에게 호남의 왜군 동향을 보고할 사람을 찾았다. 그러나 곳곳에 왜군이 점령하고 있는 2천리 멀고 험한 길을 뚫고 가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위험한 임무였다. 이때 그 임무를 자청하고 나선 소년이 정충신이었다. 선조(宣祖)는 권율 장군의 보고서를 품에 지닌 채 목숨을 걸고 달려온 정충신의 충성심과 용기에 감탄했다. 권율도 이 비상하게 영리하고 당찬 소년을 병조판서였던 사위 이항복에게 추천했고, 이항복의 신임을 받아 마침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충신은 만포첨사 시절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의 힘이 쇠약해진 틈을 타 만주에서 불길처럼 일어난 후금의 사정을 알아보는 막중한 임무도 자원하여 이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광해군은 정충신이 알아온 정보를 바탕으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전신인 후금과의 사이에서 실리적인 줄타기 외교에 성공할 수 있었다. 광해군은 명나라의 요구로 부득이 도원수 강홍립(姜弘立)에게 군사를 주어 보내면서도 "형편을 보아 불리하면 후금에 항복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이에 따라 강홍립이 적당히 싸우는 척하다가 항복함으로써 포로가 되었다. 강홍립도 임경업처럼 당대의 풍운아요, 비운의 장수였던 것이다. 정충신의 시호도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남이(南怡) 장군과 마찬가지로 충무공(忠武公)이다.
● 이괄의 반란 때 선봉장으로 맹활약
이야기는 다시 임경업 장군의 일대기로 돌아가 이괄의 반란 때 그의 활약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는 광해군(光海君)을 쫓아내고 인조(仁祖)를 임금으로 세운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공을 세웠지만 논공행상(論功行賞)이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었다. 이괄은 인조반정 때 비록 뒤늦게 참가했지만 목숨을 걸고 거사의 주력인 병력을 지휘함으로써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2등공신에 봉해졌으며, 나중에는 장만(張晩)의 아랫자리인 평안병사로 임명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은 인조 재위 2년 정월에 평안도에서 군사를 일으켜 서울로 진격했다. 그의 휘하에는 임진왜란 때 항복한 130여명의 왜군 조총부대까지 있었다. 이괄이 불과 20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선조의 열째 아들 흥안군을 새 임금으로 내세웠을 때 겁에 질린 인조는 이미 공주까지 피난을 간 뒤였다.
장만이 이끄는 관군과 이괄의 반란군은 서울 인왕산 자락 안현 길마재, 오늘의 서대문구 현저동 일대에서 맞붙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 임경업은 선봉장으로 맹활약하여 이괄의 반란군을 섬멸하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그날 접전에서 오전에는 왜군 조총부대의 위력에 바람까지 관군 쪽으로 불어 전세가 불리했으나, 오후 들어 풍향이 북풍으로 바뀌자 정충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고춧가루와 재를 뿌리게 했다. 이에 반란군의 기세가 급속히 꺾였다. 정충신은 백성들을 시켜 적진의 뒤편으로 돌아가 꽹과리와 징을 마구 치며 "이괄이 졌다!"고 외치게 했다. 이 소리에 이괄의 군사들은 사기가 더욱 떨어졌다. "장만이 불만이요, 이괄이 꽹과리다."라는 속담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관군의 총사령관 장만은 이때 파주에 있었기에 전공을 세우지 못해 불만이었고, 이괄은 꽹과리 소리에 대패하여 결국 죽음을 재촉했다는 뜻이다. 이 길마재 전투에서 임경업은 군사를 독려하여 산꼭대기에서 화살을 비오듯 퍼붓도록 하고, 앞장서서 적진에 돌격하여 마침내 승세를 탈 수 있었다. 크게 패한 이괄은 경기도 이천까지 달아났으나 결국 부하들의 손에 목숨을 빼앗겼다.
그런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지 않은가? 이괄이 반란을 일으킨 이유에 대해서도 이설(異說)이 있기에 소개한다. 이괄이 반정 성공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만주에서 일어난 후금의 동태가 심상치 않자 이괄은 평안병사로서 영변에 산성을 수축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장수로서 당연히 할 일을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괄을 시기하는 무리가 그가 불만을 품었기에 반란을 일으키고자 군사를 훈련시킨다고 무고를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이괄을 체포하라는 명령얼 내렸다. 그러자 막다른 골목에 몰린 이괄이 이런 임금과 조정에 충성을 바쳐봤자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1만여 군사를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어느 쪽이 맞는 주장인지는 필자도 알 수 없기에 독자들의 판단에 맡긴다.
어쨌든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뛰어난 전공을 세운 임경업은 1등진무원종공신으로 봉해져 이때부터 당대의 뛰어난 장수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리고 우림위장과 방답첨사를 거쳐 낙안군수를 지냈다. 그러다가 인조 재위 5년(서기 1627년)에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났다. 그러면 정묘호란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 국제정세에 어두워 정묘호란(丁卯胡亂) 자초
광해군이 쫓겨난 뒤 왕위에 오른 인조(仁祖)는 광해군(光海君)의 실리 외교정책을 버리고 노골적인 친명반청(親明反淸) 자세를 취했다. 국제정세에 어두워 명나라가 다 망해가는 판에도 사대주의 의리를 지킨답시고 선택한 것이 친명정책(親明政策)이었다. 그러나 후금(後金)이 그냥 두고 볼 턱이 만무했다. 광해군 때에는 절묘한 줄타기 외교로 안전을 유지했지만 사정이 달라졌던 것이다. 후금의 건국자 누르하치[奴爾哈齊]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먼저 명의 맹방인 조선부터 제압하기로 작정했다. 전략적으로 후방의 안전 확보가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마침 조선에서는 이괄의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었는데, 그 잔당 일부가 후금으로 도망쳐 광해군 폐위와 인조 즉위의 부당성을 호소했다.
이를 호기로 생각한 청(淸) 태조(太祖) 누르하치는 친히 3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 공격에 나섰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한 것이 불과 35년 전의 일이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끝난 것이 불과 29년 전의 일인데, 조선의 임금과 조정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교훈을 잊은 채 여전히 집안싸움만 벌이다가 또다시 무비유환(無備有患)을 자초한 것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이율곡(李栗谷)이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했고, 다른 우국지사들도 국방력 강화를 주장했건만 조선은 여전히 군사다운 군사가 수만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철기병(鐵騎兵)이라고 불린 백전연마의 후금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조정은 서울을 버리고 강화도로 들어갔지만 후금군의 강력한 무력시위에 결국 무릎을 꿇고 말았다. 누르하치는 조선과 형제의 의를 맺은 뒤에야 철군했다.
그때 좌영장으로 있던 임경업 장군은 급히 강화도로 달려갔으나 이미 화의가 성립되어 적군이 물러간 뒤였다. 임경업은 너무나 통분하여 대신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저에게 군사 4만명만 맡겨주신다면 반드시 오랑캐를 뒤쫓아가 섬멸하고 압록강 물에 칼을 씻고 돌아오리다!"
대신들은 모두 먼 산만 바라보았다. 임경업에게 주고 싶어도 줄 군사가 없기도 했지만,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이라 만일 피해면 더욱 잔인한 보복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 대신 조정은 임경업에게 평양중군직을 맡겼다. 인조 재위 8년(서기 1630년)이었다. 임경업은 평양에 부임하여 검산성과 용골성 등을 수축하며 또 다시 있을 청군의 침범에 대비하다가 3년 뒤인 인조 재위 11년에는 청천강 이북을 방어하는 청북방어사 겸 영변부사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입록강 국경을 방어하는 의주부윤으로 전임되었다. 임경업은 의주성과 백마산성을 수축하며 여전히 청군의 재침을 경계했다.
당시 후금은 만주에 이어 몽골까지 석권하고 전 중국 대륙을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최후의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기울어져 가는 국운에 따라 명나라의 장수들도 하나 둘 후금에 투항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분을 중시 여기는 조선 조정의 친명파 대신들은 명나라를 위해 싸울 작정을 하고 있었다. 이런 무모한 명분론자 가운데는 임경업 장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무렵,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청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명나라에서는 반역자들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조선에 원병을 청했다. 조선 조정은 임진왜란 때의 은혜를 갚고, 정묘호란의 치욕도 씻을 기회라고 여겼는지 임경업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가게 했다. 임경업은 명군(明軍)과 합세하여 우가장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데 가장 큰 공을 세웠다. 이 공로에 보답하는 뜻에서 명나라의 황제 의종(毅宗)은 임경업에게 총병(摠兵)이란 벼슬과 더불어 관모(官帽)에 장식할 금화(金花)를 내렸다. 이를 계기로 명나라에 대한 임경업의 의리는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 무모한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으로 병자호란(丙子胡亂)까지 불러와
그러다가 인조 재위 14년(서기 1636년)에 마침내 임진왜란 이후 최악의 참상인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벌어졌다. 국호를 후금에서 청으로 고친 청(淸) 태종(太宗) 홍타시[皇太極]가 황제 즉위식을 가졌는데 주변의 모든 나라가 축하사절을 보냈지만 오로지 조선 사신만 하례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아직도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와 여진족(女眞族)을 오랑캐로 여기는 천대 의식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노한 태종은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왕자를 불모로 보내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완고한 조선 조정은 들은 척도 않고 이 요구를 묵살해 버렸다. 태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에 앞서 임경업은 청군의 재침 의도를 간파하고 대책에 부심하고 있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병력의 열세를 절감하고 2만명의 증원군을 조정에 요청했으나 김자점 같은 친청파의 반대로 이 요청은 기각되었다. 임경업은 자력으로 방어전을 펼치기로 하고 총동원령을 내렸다. 그러자 의주 백성 대부분이 성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 달아나는 바람에 성안에는 겨우 8백명밖에 남지 않았다. 묘안을 강구하던 임경업은 허수아비 수천개를 만들어 백마산성 주변에 세워두었다. 멀리서 보면 수천 군사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의병계(疑兵計)였다. 그러자 청군은 초전부터 조선 관군과 맞붙어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고 병력을 잃는 손해를 보기 싫어서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질풍처럼 남하했다.
청군은 평양을 점령하고 개성을 거쳐 불과 10일만에 서울을 함락시켰다. 그 사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란하려다가 이미 길이 막혔다는 헛된 정보를 듣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명나라 구원군의 도착을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지만 명군보다 청군이 더 빨라 이틀 뒤에 남한산성은 그야말로 철통처럼 포위당하고 말았다. 임금을 비롯한 1만 4천여명의 민관군(民官軍)이 그렇게 포위당한 가운데 47일을 버텼지만 식량도 떨어지고 전의도 꺾이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비롯하여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나와 오늘의 송파구인 한강변 삼전도에 이르렀다. 그리고 오랑캐라고 멸시하던 청황(淸皇) 태종(太宗)에게 삼배구고두를 했다. 이는 신하의 예를 갖추기 위해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식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니, 조선 역사상 이런 치욕은 앞에도 없었고 뒤에도 없었다. 인조의 항복을 받아낸 태종은 소현세자와 뒤에 효종(孝宗)으로 즉위하는 봉림대군(鳳林大君) 및 항전을 주장하던 척화파(斥和派) 대신들을 포로로 이끌고 심양으로 돌아갔다.
이때 임경업 장군은 청황 태종 이하 청나라 대신과 주력군 모두 남한산성을 포위 공격하는 틈을 타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의 가르침에 따라 청의 심장부인 심양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이 또한 친청파(親淸派) 김자점(金自點)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 명군과 내통 사실 드러나 청군의 포로로
병자호란이 끝난 뒤에 청황(淸皇) 태종(太宗)은 평안도 앞바다에 있는 명나라의 군사기지인 가도를 공격하기 위해 전승국이란 명목으로 조선에도 출병을 강요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임경업을 출전시켰다. 임경업은 군사를 거느리고 갔지만 명군(明軍)과 싸울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청군 몰래 명나라 장수 심세괴(沈世魁)에게 전갈을 보내 대비토록 하는 한편, 군?永湧? 시켜 "우리 나라 법도에 남의 땅을 점령하면 그곳의 재물은 마음대로 약탈해도 된다."는 말을 퍼뜨리게 했다. 이 소문을 들은 청군(淸軍)이 싸움이 벌어지자 앞다투어 나섰으므로 조선군은 싸우는 척하기만 했다.
인조 재위 10년(서기 1638년)에 임경업은 평안병마절도사 겸 안주부사로 임명되었다. 무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위직에 오른 것이다. 그는 안주에 병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의 훈련을 강화하며 청군의 동태를 주시했다.
인조(仁祖) 재위 20년(서기 1642년)에 청나라는 명의 금주를 공격하기 위해 또 다시 조선의 출병을 요구했고, 이번에도 조정은 임경업을 출전시켰다. 그런데 조선군이 죽을힘(?)을 다해 싸웠지만 이상하게도 명군 가운데서 전사자가 한명도 나오지 않았다. 임경업이 명군 장수 홍승주와 내통하여 서로 화살촉을 모두 빼고, 대포에는 탄환 대신 흙덩어리를 넣어 쏘았기 때문이었다. 명군도 조선군에게 활을 쏠 때에는 일부러 사정거리에 미치지 않도록 했으니 손실이 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자꾸 되풀이되자 마침내 청나라 장수들도 임경업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어서 결국 임경업이 명군과 밀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는 청국 조정의 요구로 붙잡혀가는 신세가 되었다. 명의 마지막 장수였던 홍승주가 청에 투항한 뒤 조선의 중 독보를 밀사로 하여 임경업과 자신이 몰래 내통했던 전후 사정을 모두 자백했기 때문이었다. 이 보고를 받은 태종은 크게 노해 당장 임경업과 독보를 잡아오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는 당시 영의정 최명길(崔鳴吉)도 관련이 잇었다. 최명길은 병자호란 때 주화파(主和派)를 대표하여 척화파(斥和派)의 거두 김상헌(金尙憲)과 맞섰던 인물이지만, 그 역시 나라를 위해 화평을 지지했던 것이지 진심으로 청나라에 사대하는 마음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명나라와 내통한 반청운동(反淸運動)의 배후에 임경업과 독보 외에 조선의 대신들까지 연루된 사실을 알게 된 청은 이번 기회에 아예 반청세력을 완전히 뿌리뽑기로 작정했다.
결국 조선 조정은 청(淸)의 요구에 굴복했고, 이에 따라 최명길을 비롯한 대신들과 더불어 임경업도 붙잡혀 청으로 끌려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 정승 심기원(沈器遠)이 끌려가는 그에게 몰래 은전 7백냥과 승복(僧服)과 환도(環刀)를 전해주었다. 심양으로 끌려가는 죄수 아닌 죄수 일행이 금교역에 이르렀을 때 임경업은 옥문을 부수고 청군 경비병 네댓명을 살해한 뒤 승복으로 갈아입고 경기도 양주군 회천읍 천보산 회암사로 도망쳤다. 한때 조선의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임경업은 그렇게 중으로 변장한 채 전국에 내린 수배령을 피해 숨어다니는 신세가 되었다. 각지를 숨어서 돌아다니던 임경업은 마포나루에서 배를 빼앗아 연평도를 거쳐 황해를 건너가 아직도 가냘픈 명맥을 이어가고 있던 명나라로 망명했다.
임경업이 도망쳤는데 붙잡지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청나라에서는 그의 부인 전주(全州) 이씨(李氏)를 인질로 잡아갔다. 이씨 부인은 심양의 감옥에 갇히자 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고 말았다.
● 명으로 망명, 청군에 포로, 다시 조선으로 압송
임경업이 천신만고 끝에 명나라로 망명하자 명황(明皇) 의종(毅宗)은 그에게 부총병을 제수하고 명군과 함께 청의 심양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임경업은 명군 장수 황용(黃龍), 마등홍(馬登紅) 등과 더불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갔으나 청황(淸皇) 세조(世祖)가 친히 이끈 청군의 강성한 기세에 겁을 먹은 황용은 도망치고, 마등홍은 엉뚱하게도 제 살 길을 찾기 위해 임경업을 포박하여 청군 진영에 항복했다. 그런데 그 직전인 인조 재위 22년(서기 1644년) 3월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북경을 함락시키자 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이 스스로 목매 죽어버린 사건이 일어났으니, 명나라는 실질적으로 망한 셈이었다.
세조는 임경업에게 부귀영화를 약속하며 청나라에 귀순토록 회유했다. 하지만 항복할 임경업이었다면 이미 오래 전에 항복하고 편한 길을 걸었을 것이다. 임경업은 온갖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북경 옥에 갇혔다.
한편 조선에서는 그 사이에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났다.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이었던 심기원(沈器遠)은 좌의정까지 지냈고, 전에 임경업이 심양으로 잡혀갈 때 노자까지 챙겨준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인조반정을 주도했던 서인(西人) 가운데서도 주체세력은 공서파(攻西派)가 정권을 장악하다가, 공서파도 다시 노서(老西)와 소서(少西)로 나뉘고, 다시 원두표(元斗杓)를 우두머리로 한 원당(原黨)과 김자점(金自點)을 우두머리로 한 낙당(洛黨)으로 갈려 치열한 정권투쟁을 벌였다. 인조 말년에는 낙당의 김자점이 득세하고 있었는데, 김자점은 전부터 임경업을 싫어하던 인물이었다. 이 김자점이 심기원을 역모혐의로 몰아 죽이고, 임경업도 심기원과 관련이 있다고 하여 청나라에 임경업의 송환을 요청했다.
회유도 협박도 통하지 않던 차에 조선에서 보내달라니 청에서는 죽이지도 못하고 살리지도 못하던 귀찮은 존재 임경업을 함거에 실어 조선으로 압송했다. 충신이요, 대장부에서 난데없는 역적 누명을 쓰고 고국으로 끌려온 임경업에게 김자점은 역모죄를 자백하라면서 모진 고문을 가했다. 임경업은 이렇게 항변했다.
"심기원이 역모를 꾀했다는 사실을 나는 전혀 알지 못했소. 또 나는 명나라에 있었고, 심기원과는 친한 사이도 아니었소!"
하지만 이미 죽여 없애기로 작정한 김자점에게 그런 말이 통할 리 만무했다. 결국 일세의 영웅 임경업은 하지도 않은 역모죄를 뒤집어쓴 채 혹독한 고문 끝에 목숨을 빼앗기고 말았다. 인조 재위 24년(서기 1646년) 당시 그의 나이 53세였다. 임경업은 죽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는 좁은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을 한탄하고 있었던 것이다.
● 억울하게 죽은 뒤 민중의 신장으로 추앙받아
"아! 나는 어찌하여 이 좁은 땅에서 태어나 초라하게 살아야 했던가! 천하의 일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하다니..."
그는 또 평소에 이런 말도 했다고 한다.
"나는 천지의 기품을 타고날 때 물건이 되지 않고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더구나 여자가 아니라 남자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그때까지 임경업이 '대장부'라고 쓴 종이쪽지를 품에 간직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대장부로서 한평생을 보낸 당대의 영웅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어김없이 도는 법이다. 임경업을 죽인 김자점도 얼마 뒤에 역시 역적으로 몰려 그의 뒤를 따랐다.
인조(仁祖)의 뒤를 이어 효종(孝宗)이 즉위하여 북벌론(北伐論)이 한창일 때 임경업 장군은 이미 백성의 영웅신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 이미 임경업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의 전공(戰功)을 과장 미화하고 전설화한 소설이 만들어져 민간에서 인기를 끌고 있었다고 한다. 또 효종 때 남구만(南九萬)은 이런 상소문을 올렸다.
'임경업이 심기원의 역모사건에 관련되었다는 말은 당시 문초당하던 역적의 입에서 나오기는 했으나 임경업 자신은 끝까지 불복하다가 죽었습니다. 또 인조 대왕께서도 그의 정경을 가련히 여겨 원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조정에서는 평상시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죽은 뒤라도 그의 죄를 씻어주면 가히 국가적인 성사(成事)라 하겠습니다. 그가 명나라로 도망친 것은 우리 나라의 굴욕적인 항복을 씻기 위해서 간 것이었지 죽음을 두려워하여 도망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임경업이 신원되고 관작이 복구된 것은 그로부터 세월이 좀더 흐른 숙종(肅宗) 재위 23년(서기 1697년)이었다.
충주시내에서 벗어나 3번 국도를 타고 수안보 쪽으로 가다 보면 달천강가에 충렬사(忠烈祠)가 있다. 충북 충주시 단월동의 사적 제189호 충렬사는 임경업 장군의 사당으로서 영조 때에 세워졌고, 정조(正祖)는 재위 15년(서기 1791년)에 친필 제문을 내렸는데, 그것을 새긴 비석이 어제달충렬사비이다. 또한 사당에 모셔진 임경업 장군의 영정은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로, 달천교 건거 풍동의 임경업 장군 묘는 1982년에 대대적인 정비를 하여 충북도 지방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충렬사 기념관에는 임경업 장군이 사용했다는 추련검(秋蓮劍)이 있고, 숙종 때 부인 이씨에게 내린 정렬비도 있다.
참고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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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출처 : 한국사의 영웅과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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