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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3. 보름스와 마르틴 루터 - 독일-스위스-알사스-베네룩스 3국 여행

회기로 2018. 8. 8. 09:57

3. 보름스와 마르틴 루터 - 독일-스위스-알사스-베네룩스 3국 여행



로르슈에서 오늘의 숙소가 있는 보름스까지는 20Km가 채 되지 않는 거리.


사실 나는 작년인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서

내심으로는 마르틴 루터의 여정을 밟아보리라고 했었는데

여러가지 일로 시간이 나지 않아 실현시키지 못했다.


보름스에는 2004년에 금요일까지 출장을 마치고

토요일 공항으로 가던 중  잠깐 들른 적이 있었는데

전혀 계획하지 않았던 일인데다가 준비부족으로 인해

어디가 어딘지 잘 몰라서

 마르틴루터의 흔적은 성당 옆의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잠시 찾고

보름스 대성당만 대충 보고 그냥 지나쳤었다.


이번 여행에 보름스 일정을 넣은 것은

2004년과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에 못 가본 것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기도 하고

60년 가까이 지난 그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어린 애였던 나에게 

마르틴 루터 위인전을 사다 주시기까지 하셨던

 선친께서 가장 존경하셨던 마르틴 루터의 흔적을

조금이나마 자세히 보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음 일정인 슈투트가르트에 가기 전 1박할 가장 적당한 위치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보름스의 마르틴루터광장-동상의 설명은 아래에...)


내비게이션으로 호텔 주소를 찍었는데

막상 보름스 시내에 들어오니 곳곳의 도로가 

임시로 일방통행으로 되고 여기저기가 막혀 있다.

겨우 보름스 성당 바로 옆에 있는 호텔 뒤 공터로 가니

무대가 세워져 있고 한 사람이 나와서 주차가 안된다고 한다.

무슨 행사가 있나보다.

호텔에 짐만 갖다 놓고 차를 이동하겠다고 하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이틀인가 후부터

니벨룽의축제(Nibelungenfestspiele)가 시작된다고 한다.

호텔에 짐을 넣고 근처 공영주차장에 주차하고 왔더니

호텔 레스토랑에 동양인 아줌마가 두명 앉아 있다.

혹시 '윤춘식 씨와 동행이 아니신가요?'라고 물었더니 그렇단다.

우리보다 일찍 도착해서 시내 한 바퀴를 돌고 오는 길이란다.


그렇게 춘식이(70이 다된 친구의 이름을 그냥 글로 쓰는 것은

본인에게는 실례가 될 지 모르지만)를 만났다.

오늘 하루동안 쾰른, 코블렌츠, 마인츠를 다녀왔단다.

내일 부터는 프라이부르크를 포함해서 슈바르츠발트(흑림) 지역을

돌아볼 예정이라고 한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잘 시간이 되었다.

호주에 돌아가기 전에 서울에서 20여 일 지낼 것이라고 하니

 아쉬운 이야기는 다시 서울에서 만나서 하기로 했다.


5월 30일


원계획 = 실제여행

보름스--> 슈파이어대성당(U)-->마울브론수도원(U)--> 게를링엔-->슈투트가르트(숙소)


아침이 밝았다.

시차적응이 안되어 밤새 뒤척거리고 거의 잠을 못 잤다.

새벽 5시 전인데도 환하다.

호텔 방 창문에서 보이는 보름스대성당(Wormser Dom)이

카메라의 한 앵글에 다 들어오지 않는다.

출장길에도, 여행 중에도 항상 그랬듯이 일찌감치 시내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씻고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하니 성당 건물에 해가 비치기 시작한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서양 용의 조각이 보인다.

 이곳이 중세의 서사시  '니벨룽의 노래(Nibelungenlied)'의 무대라는 것이 실감난다.

필시 저건 어제 로르슈에서 잠깐 언급되었던 지그프리트가 물리친 용일 것.


그리고 호텔 바로 앞에 설치된 몇 개의 표지판.

한쪽은 독일어, 뒷면은 라틴어로 써 있다.

마르틴 루터의 도시답다.

아니,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마르틴 루터가 며칠 머물지도 않았던 이곳이

마르틴 루터의 도시처럼 된 것은

1521년 4월에 있었던 보름스 제국의회때문이다.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을 통하여'


호텔 바로 옆,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된 마르틴 루터가 섰던 제국의회 회의장은

지금은 없어지고 그 자리는 공원이 되어 있다.

그런데 아침 일찍이라 그런지 공원 문이 잠겨 있다.

저 안이 루터가 서 있던 회의장 자리라는데...


담을 끼고 돌아가니 하일스호프박물관(Stiftung Kunsthaus Heylshof) 이 나온다.

공원은 사실 이 박물관의 부속 공원인 셈이다.   


공원을 둘러싸고 있는 담을 따라 걸으니,


보름스대성당 뒤편이 나온다.

공원의 철창문이 조금 열려 있어서 들어가려고 했더니

옆에 있던 축제 관련 경비원이 아침 10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단다.



발걸음을 돌려 마르틴루터광장으로 향했다.

루터광장의 기념 동상.

1868년에 제작된 이 동상은

루터와 종교개혁과 관련된 인물들의 동상들과

종교개혁에 참여한 도시들의 이름들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중앙의 마르틴 루터.



마르틴 루터의 동상 바로 아래에 새겨진

'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Gott helfe mir, Amen'

'제가 여기 섰나이다.

저는 달리 어찌할 수가 없나이다.

하나님, 저를 도우소서'


1521년 1월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파문당한 루터는

 보름스 제국의회에 소환되어 4월 16일에 보름스로 온다.

4월 17일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알 5세의 앞에 서서

기존의 저술과 입장을 철회하라는 황제와 카톨릭교회의 요구에

하루간의 말미를 얻은 루터는 다음 날인 4월 18일 드디어

역사에 남을 순간을 맞이한다.  

개혁의지의 철회를 거부했고

보름스회의에서의 짧았던 이틀의 사건은

중세를 거쳐온 종교사 상의 일대 변혁을 일으키는 종교개혁의

하일라이트와 같은 순간이 되는 것이다. 


1517년의 비텐베르크에서의 95개조문의 반박문이 횃불을 든 것이라면

보름스 이후 성겅의 독일어 번역과 인쇄, 보급은

종교개혁의 들불로 번져 나갔던 것이다.


(황제 카알 5세, 선제후들 앞에 선 마르틴 루터)


동상군(群) 네 모퉁이중 앞의 양쪽에는

 보름스 회의 후 루터를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으로 피신시켜

라틴어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했던

루터의 옹호자 작센영주 프리이드리히 3세와,


또 다른 프로테스탄트의 후원자 헤쎈의 영주 필립 1세.


그리고 동상 뒤의 양쪽에는

루터의 동료 종교개혁가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멜란히톤의 외종조부이자 인문학자인

요하네스 로이힐린(Johannes Reuchlin)



루터의 동상 아래 네 모퉁이는  네명의 종교개혁가들이 자리잡고 있다.


얀 후스( Jan Huss) 1415

루터보다 약 100년 앞선 체코(보헤미아), 프라하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 

1415년, 신분보장을 받고 콘스탄츠 공의회에 참석했으나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하고 만다.

체코 프라하 광장에 있는 큰 동상의 주인공이다

이번 여정에 콘스탄츠가 포함되어 있어서 다시 언급할 기회가 있을 것...


페트루스 발두스 Petrus Waldus(피에르 왈도) 1197

프랑스 리옹출신의 성결운동가, 종교개혁가.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 1387

영국의 신학자이자 종교개혁가

성경을 영어로 번역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카톨릭에 의해

콘스탄츠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규정되고 부관참시된다.

성경이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만들 것이라고 했는데

후일 링컨이 이 말을 가져다 썼다고 한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 Hieronymus Savonarola1498)

이탈리아의 도미니쿠스 파의 수도사, 종교개혁가 

피렌체의 정치지도자로 메디치가와 대립.

종교재판후 화형됨.



양 옆과 뒤에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는 조각 3점은

루터의종교개혁과 관련된 세 곳의 도시를 상징한다.


아우크스부르크의 평화  (Augsburger Friede) 1555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화의에서 루터파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을 상징한다.


저항의 슈파이어(Protestierende Speyer ) 1529


1529년 슈파이어대성당에서 열린 종교회의에서는 카톨릭지도자들이

종교의 분리를 주장하는 일부 제후와 루터주의자들의 활동을

일체 금지하는 결정을 한다.

이에 루터주의를 지지하는 제후들이 항의를 하며

카톨릭에서의 분리를 주장하게 된다.

프로테스탄티즘, 프로테스탄트라는 용어가 슈파이어에서 시작된 것이다.


슬픔의 마그데부르크(Trauernde Magdeburg) 1631


신,구교도 간의 30년 전쟁의 와중에 신교로 돌아선 마그데부르크.

1631년 구교도군에 의해 함락되어 도시가 파괴되고

20,00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되었다.



그리고 장 칼뱅(요한 칼빈)과 울리히 츠빙글리.

 칼뱅은 칼뱅주의(장로교, 청교도, 위그노 등),

츠빙글리는 취리히에서 종교개혁을 함.



마르틴 루터의 활동 모습들.

1517년 비텐베르크 성당의 95개조 반박...


성경번역, 설교


그리고 도시들의 문장 20여 개가 새겨져 있다.




루터동상(Lutherdenkmal)뒤로 하고

화단으로 둘러싸인 길을 간다.


아마 2차대전 전몰장병 위령비인 듯하다.


루트비히광장과 기념탑. 



보름스 시청앞의 '정의의 분수'와 시청사 시계탑.

여기도 니벨룽축제 때문에 전부 막아놓고 아침 일찍부터 공사준비에 바쁘다.



역시 용을 밟고 있는 기사의 분수.

니벨룽의 노래의 주인공 지그프리트일 터...


맞은 편의 보름스 대성당의 동쪽 첨탑이 벌써부터 햇빛을 잔뜩 받고 있다.


보름스대성당(Wormser Dom)


독일 로마네스크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 중의 하나인 보름스 대성당.

이른 시간이라 아직 잠겨 있어서 호텔로 돌아가서

아침식사 후에 이곳 저곳을 다시 돌아볼 예정이다.






호텔 바로 옆, 무대 뒷편에 있어서 섭섭한 분수대의 조각.

용을 짓밟고 있는 이도 지그프트를  상징하는 모양이다.


아침식사를 위해 호텔로 들어왔다.

보름스관광을 위해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한 호텔...

 3층짜리 건물에 엘리베이터가 없어서 2층의 방까지 짐 운반이 불편했던 것 외에는

아침 식사도 훌륭하고 가성비가 최고다.

보름스대성당을 한 눈에 올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장소이기도 했다.

레스토랑을 겸한 이 호텔의 안주인도 친절하기가 그만이다.


식당에서 윤춘식군의 일행을 다시 만났다.

식사 후에 각자 제 갈길을 가기로 했다.

식사 후 일행들을 데리고 새벽에 혼자 돌았던 길을 다시 간다.


루터광장과 루터동상


 공원을 따라서 꽃들을 보면서...




전물장병 기념조형물을 보고

루트비히광장으로 간다.



시내의 예쁜 건물도 보고,


 발걸음을 돌려 지금은 공원이 된 보름스제국의회장 터인 공원으로 돌아간다.

공원 안도 한창  니벨룽축제 준비 중이다.

이곳 저곳 간이 텐트들이 들어서 있다.

그 중의 한 텐트에서 본 니벨룽 축제 사진 패널.


정원 내에는 꽃들도 있다.


아, 그렇다 바로 이곳.

1521년 4월 18일

마르틴 루터는 바로 이 자리에 섰다.

저 신발이 있는 자리에.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전에 여기에 있던 글자판을 없애고 신발 모양을 만들어 놓았다.


2017년 이전의 사진.(글자판)

내가 출석하는 신일교회 김일석 목사님이 촬영해서

작년 종교개혁 500주년 기념  전시한 사진 중 한 장이다.


2018년 5월30일 -글자판 대신 신발이 놓여져 있다.


… Solange mein Gewissen durch die Worte

Gottes gefangen ist,

kann und will ich nichts wiederrufen,

weil es unsicher ist und

die Seligkeit bedroht,

etwas gegen das Gewissen zu tun.

Gott helfe mir. Amen.


Martun Luther

Am 18, April 1521 Vor Kaiser und Reich


나의 양심이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나는 철회할 수도 없고 철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반(反)하는 일을 하는 것은

위험하기도 하고 축복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


마르틴 루터

1521년 4월 18일 황제와 제국 앞에서.




 4월 18일 또 다른 마르틴 루터의 말...

이 말도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로 끝난다.


다음 날인 4월 19일의 황제 카알 5세의 말도 있고...


5월 25일 황제 카알 5세는 보름스칙령을 발표하여


마르틴 루터를 악명높은 이단자로 규정했다.  

루터의 주장을 옹호하거나 인정하거나 찬성하는 모든 것들을 금지하고

루터를 체포해 오는 자에게 사례할 것을 약속하였다.

루터는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지만

이보다 앞서 루터가 보름스를 떠나자

작센의 선제후이자 루터의 후원자인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위장 납치하여

아이제나흐의 바르트부르크성에서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하였고

이를 계기로 종교개혁의 불길은 더욱 번져가게 되었다. 



공원에서 바로 옆의 보름스대성당으로 들어가지만

보름스 대성당은 다음 회 별도의 편으로 정리하기로 하고

마르틴 루터와 관련된 이야기를 정리하고 마치기로 한다.

시청사 바로 옆, 호텔 맞은 편에 있는 삼위일체교회(Dreifaltigkeitskirche).

프로테스탄트 교회이다.


며칠 머무르지 않았던 마르틴 루터의 흔적은 보름스 곳곳에 남아 있다.

삼위일체교회 전면 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

'1521년 4월 18일, 황제와 제국 앞에 선 마르틴 루터'





교회 문을 들어서면 마르틴 루터의 두상이 벽에 있다.


그리고 삼위일체교회 내부...









황제 카알5세 앞에 선 마르틴 루터 -모자이크 그림이다.



교회 입구 전실에는 종교개혁 500주년 관련,

자료들이 전시 중이었다.

1517년, 비텐베르크의 95개조 반박문 게시 


보름스 제국의회 장면.








황제 카알 5세





2018년 5월 29~30일


1521년 4월의 보름스의 그 장소는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마르틴 루터의 발자취는 그대로 남아 있다.

'여기 제가 섰나이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계속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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