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곡(晦谷) 권춘란(權春蘭) | ||
1539년 안동군 와룡면 가구동에서 태어난 회곡 권춘란은 선조조 유현(儒賢)이었다. 본관이 안동인 그는 선천적으로 학문을 좋아하고 고결한 인품을 숭상했다. 또 그는 용모마저 준수하여 주위사람들을 장래 그의 덕기(德器)가 크게 빛날 것으로 기대했다. 그가 어릴 때부터 보통 아이들과 달랐던 점은 그의 아버지와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다. “아버지 하늘과 땅 사이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합니까?” 이를 기특하게 생각한 권춘란의 아버지는 시험삼아 효경(孝經)을 가르쳤다. 한번은 주역의 괘효(卦爻: 역괘의 여섯획)를 본 따서 그리는 것을 본 그의 아버지는 “이것은 대인(大人)이 배우는 것이어서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공부가 아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권춘란은 “저는 항상 대인의 뜻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더욱 신통하게 여긴 아버지는 권춘란을 이웃 마을에 살며 문명(文名)이 쟁쟁한 청년 백담(栢潭) 구봉령(具鳳齡)에게 보냈다.
권춘란은 배우고자하는 열의와 성의가 이토록 대단했으므로 수업의 진도 또한 빨랐다. 구봉령에게서 상당한 학업을 닦은 뒤 그는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가르침을 청했다. 구봉령을 통하여 권춘란의 총명과 인품을 익히 들은 이황은 찾아온 그를 위해 윗자리를 피하면서 매우 정중히 대접하였다. 이것은 권춘란의 비범성을 평가하는 뜻인 동시에 대현(大賢) 이황의 겸손함이 듬뿍 담긴 일화다. 권춘란의 제1의 학문은 그 당시 도학자들이 추구한 위기지학(爲己之學) 즉 성현을 본받으려는 인간수양 바로 그것이었다. 이밖에도 그는 유가, 도가, 음양가, 법가, 명가, 묵가, 종횡가, 잡가, 농가 등 구류백가(九流百家)의 서적을 섭렵하여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주역에 능통했다. 이러한 그는 2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25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검열, 감찰, 대동찰방, 정언, 지평, 지방고을의 수령직을 맡았다. 그러나 그는 언제나 관직생활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고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심했다. 말년에 그는 세살 아래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 더불어 모르고 의문 나는 부문을 서신왕래로 서로 묻고 답했다. 선조임금은 신하들에게 “권춘란이 벼슬을 싫어하는 것은 나와 함께 일을 할 수 없다는 말인가”하며 섭섭하게 생각하였다. 학문과 산수를 지극히 사랑하여 숲속에서 글을 읽고 도를 강조한 그는 효행과 우의가 아주 깊었다. 어머니가 병중에 계실 때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 달여 드려 한 달 만에 낫게 하였다. 그의 형제 4명은 언제나 화목하고 즐겁게 지내 거처를 같이하였고 옷, 신, 종, 마부 등이 일정한 주인이 없을 정도였다. 짧은 관직생활 이였지만 공직에 나아가면 그는 언제나 민심을 바르게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하는 것을 우선하여 불쌍한 주민을 친자식처럼 보살펴 주었다. 한번은 그가 지방수령 재직 때 흉년든 해를 만나자 관아의 곡식을 풀어 궁한 사람들을 구휼하고 곡식을 거들 때가 되어서는 그 문서를 모두 불태우면서“만일 이것으로 책임문제가 따르면 내가 당하리라”하였다. 의성(義城)을 떠나면서 짐꾸러미를 조사해보니 자초(紫草) 한 자루가 있는지라 그는 “어찌 이 물건이 내 자루를 더럽힌단 말인가” 하고 돌려보냈다. 영천(榮川: 현영주)군수시절 그는 그 지방의 주민들이 미신을 좋아해서 음사(淫祀)를 숭봉하고 있는 것을 보고 단호한 철폐령을 내렸다. “귀신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나 또한 사람을 죽일 수 있다. 앞으로 계속 이 같은 괴이한 풍속을 따르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 후 영주지방의 해괴한 풍속은 자취를 감추었다한다. 그는 스승 구봉령이 병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가 간병하기를 부모 모시듯 하였고 결국 세상을 떠나자 그의 유문(遺文)을 교정하여 백담문집의 완성을 보았다. 지금은 흔적조차 없어졌지만 사액서원인 주계서원의 건립은 실로 권춘란의 노력의 결과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상일을 싫어한 그였지만 그는 분연히 일어나 사재를 털어 의병을 돕는 한편 의병장 김윤명(金允命) 휘하에 들어가 용전분투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다시 고향산천에 묻힌 그는 침식을 잊어가며 진학도(進學圖), 공문언인록(孔門言仁錄) 등을 서술하고 79세로 눈을 감았다. 권춘란은 후사가 없어 동생의 아들 태일(泰一)을 양자로 삼았다 태일 역시 어릴 때부터 비범하여 구봉령에게 사사했으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사위가 되었다.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권춘란의 직계손은 생활이 어려워 고향 안동을 떠나 영양군 청기면 기포동으로 옮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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