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 | ||||||
영조는 유관현(柳觀鉉) 김성탁(金聖鐸) 김경필(金景泌) 유정원(柳正源) 이상정(李象靖)이 대과에 동반급제하자 그들을 가리켜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라 했다. 추로지향으로 알려진 안동지방이지만 조선조 과거사상 5명을 동시에 합격시킨 일은 이것이 처음이요 마지막이었다. 화산풍우오룡비(花山風雨五龍飛)중 삼산(三山) 유정원(柳正源)은 1730년 지금의 안동군 예안면 주진동(三山)에서 석구(錫龜)의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이 전주(全州)인 그는 사대부의 집안 후예답게 5세부터 아버지에게 글을 배웠다. 아버지는 그의 총명함을 보고 후일 이 집안을 크게 빛낼 아이라고 예견했다.
가학에서 출발한 유정원(柳正源)의 학문의 연원은 그가 9세때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유승현(柳升鉉)을 사사함으로써 퇴계학통(退溪學統)의 맥을 이었다고 볼 수이다. 그의 6대조 유복기(柳復起)가 김성일(金誠一)의 생질이자 문인이었으며 5대조 유우잠(柳友潛)이 정구(鄭逑)의 문도였다. 유정원은 재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을 정확하게 관찰하고 분석한 후 그것을 요령 있게 정리하는 능력을 소유했었다. 10세를 전후하여 동서고금의 역사책을 읽은 그는 연대별로 국호, 정치의 변동사항, 치란의 득실(治亂의 得失), 기이하고 격조 높은 각종 상소문을 기록 정리하였다. 이것을 본 그의 7촌 아저씨이자 스승이었던 유승현(柳升鉉)은 “이 아이는 반드시 궁중의 사적과 경서를 정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홍문관의 제목이 될 것이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훌륭한 학자의 자질을 나타낸 그가 서경(書經)의 기삼백주(朞三百註)를 보고 선생에게 삼일간의 말미를 얻어 식음을 전폐한 채 연구하여 스스로 이해하여 막히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놀란 아버지가 그에게 주역을 읽게 하였다. 그는 “아버님 천하의 이치가 모두 이 책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하고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독서하고 사색하며 그 이치를 하나씩 해득(解得) 해가자 주위 사람들은 모두 혀를 내둘렀다고한다. 그가 44세 때 완성한 역해참고(易解參攷)10책을 보면 이 말이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역해참고는 그가 동서고금의 위대한 역학자들의 설(說)을 모아 비교분석한 후 자신의 견해를 첨부한 방대한 저술이다.
24세 때 그는 김경온(金景溫), 권정태(權正泰), 김성탁(金聖鐸), 유태재(柳台齋), 권치(權緻) 등 영민한 동료들과 더불어 안동 와룡산의 현사사(玄沙寺)에서 함께 기거하며 학문을 토론하고 시를 짓고 기량을 겨루니 그들의 학문세계는 깊고 넓어졌다. 그는 34세에 대과에 급제했으나 이내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온 후 15여 년 동안 오로지 학문연구와 인격수양에 힘썼다. 아마도 그가 학자로써 대성하게 된 기간은 이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의 저서 하락지요(河洛指要)도 이때 완성되었다. 40대 중반에 난해(難解)하기 그지없는 역학을 종합해석하고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보면 그가 이미 제자백가(諸子百家)를 섭렵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사실 그는 통명경사(通明經史)는 물론 천문, 지리, 음양, 복서, 주수, 병률, 도학에 이르기까지 달통한 학자로 알려졌다. 역학에 정통하다는 소식을 들은 후학들이 그를 찾아와 역해참고(易解參攷)를 보여주든가 아니면 그 오묘한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청원했다. 그는 그때마다 그들에게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평이(平易)한 학문부터 정밀하게 읽고 진실한 사색과 행동을 통하여 깨달음이 있은 연후에 역학을 공부하여도 늦지 않다고 타일렀다. 48세에 그는 다시 중앙정계에 나아갔다가 이듬해 자인(慈仁)현감으로 나갔다. 이때부터 그의 애민사상과 실용정신이 한껏 발휘되었다. 그는 우선 농사와 잠업(蠶業)을 장려하고 풍속을 법(法)이전의 순리로 다스렸다. 설사병에 걸려 농우(農牛)가 죽어가자 그는 관재(官財)로 타지방의 농우를 구입하여 10가구당 1마리씩 배정하여 사육하게 하였다. 또 고을주민들이 무거운 세(稅)부담에 허덕이자 그는 관찰사를 면대하여 실정을 보고한 뒤 세금과 부역의 고통을 덜어주었다. 통천(通川)군수 때는 대설(大雪)을 만나 굶주리는 주민을 구휼하기위해 자신이 직접 배를 타고 동해안 험지를 오르내렸는가하면 춘천(春川)고을 수령 때는 나라에 바치는 산삼의 양을 대폭 줄였다. 이 같은 그의 행정은 그의 애민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정약용(丁若鏞) 목민심서에 유정원(柳正源)의 치적사항을 자주 인용하고 있다. 통천주민이 그의 은덕을 잊지 못하여 철비(鐵碑)를 세웠는가하면 자인, 춘천 주민들도 그의 은혜를 갚으려고 한 일화가 많다. 한편 유정원(柳正源)은 세자시강원으로서도 큰 몫을 했다. 영조가 세자의 스승을 찾자 원인손(元仁孫), 채제공(蔡濟恭) 등 명신들은 입을 모아 “임금의 학문을 보필하고 세자의 학문을 도울 사람은 당대에 유정원(柳正源)을 앞설 사람이 없습니다.” 라고 했다. 세자시강원이 된 그는 성심성의를 다하여 왕의 자문에 응하고 세자의 강학을 도왔다. 결국 그는 일선행정직을 맡으면 권장하기에 앞서 물산을 장려하고 능동적인 조세행정으로 일관했고, 중앙에 있으면 해박한 학문으로 올바른 국정을 위해 왕과 세자의 바른 마음공부를 익히도록 힘썼다. 그러나 그의 애국애민사상도 운명에는 어쩔 수 없었던지 59세를 일기로 막을 내렸다.
한편 그는 뛰어난 문장가와 기개 높은 선비로서도 이름 높다. “영남의 백년 이래 최고의 문장이다”는 찬사를 받은 조옹(調翁) 이광정(李光庭)이 유정원(柳正源)의 글을 칭찬하여 “당대의 문한가(文翰家)로 그와 맞설 사람이 없다” 고 평했다. 그가 교리로 임명되던 날 공교롭게도 다른 동료 몇이 변방으로 밀려났다. 그는 혼자만 좋은 직책을 받을 수 없다는 글을 올리고 교리직을 사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조가 밤늦게 그를 불렀다. 그만큼 영조는 그를 총애했다.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그는 궁월 문 밖까지 와서는 끝내 입궐하지 않았다. 입궐하라는 명령이 밤새 11번이나 내렸으나 그는 끝까지 입시하지 않았다. 이 죄로 그는 통천군수로 좌천 되었다. 후일 영조는 이 일을 두고 대신들에게 “유모(柳某)의 고집은 지나치나 그가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확고한 태도만은 배울만하다”고 술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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